조선은 ‘모자의 나라’로 불렸다.
계절·신분·성별 등에 따라 온갖 꼴의 모자를 갖춘 조선 특유의 ‘쓰개 문화’ 덕분이다.
100여 년 전 조선을 방문했던 미국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이렇게 전한다.
“단편적인 묘사만으로 조선 모자의 가치를 다 보여주기 어렵고 품위에도 맞지 않다.”
모자를 외출용 장식품으로 사용하던 서양인에게 조선의 다채로운 모자가 꽤 신기했던 모양이다.
다른 기행문을 보더라도 조선을 ‘모자의 왕국’ ‘모자의 천국’ ‘모자의 발명국’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선조의 지혜가 담긴 다양한 모자와 그에 얽힌 사연을 소개한다.
* 남자 모자 *
(1) 흑립(黑笠)
뒤로 갈수록 커지다 대원군 때 작게 변해


갓의 본래 이름은 ‘흑립(黑笠·검은 갓)’이다. 옻칠을 했다는 뜻에서 ‘칠립(漆笠)’이라 부르기도 한다.
양반들이 주로 외출용으로 썼는데, 사대부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모자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사람을 대할 땐 반드시 갓을 써야 했다.
조선사 600년 동안 갓의 모양도 유행에 따라 변화했다.
연산군 시대엔 모자 꼭대기가 뾰족하고 아래는 넓은 갓이 유행했다. 고깔 모양과 비슷한 형태다.
다음 왕인 중종 때부터는 모자 높이가 높아지고 모자 챙은 좁아졌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부터는 모자의 높이가 더 올라가고 챙도 넓어진다. 출입문을 드나들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재료가 많이 들어가 가격도 비싸져 조선 정부가 모자의 크기를 줄이려는 정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모자의 높이는 점점 높아져 순조 때는 우산처럼 앉은 사람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커졌다.
흥선대원군 시대가 되어서야 작은 갓으로 개량된다.
갓끈도 다양하다. 영·정조 때는 호박을 엮은 긴 끈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머리카락보다 가늘게 다듬은 대나무 올을 엮어 옻칠을 하고 붉은 실을 감은 갓끈은 왕이 쓰던 것이다.
옥으로 해오라기를 조각해 갓 꼭대기에 붙이기도 했다. 선비들의 고고했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2) 백립(白笠)
평상시에 썼지만 점차 국상 때만 써


명성황후 국장-백립과 흰 장옷을 입은 백성들
백립은 상중(喪中)에 쓰던 흰 갓이다. 대나무로 엮은 갓에 흰색 천을 둘러 만든다.
조선 초기엔 평상시에도 쓰고 다녔지만 점차 국상(國喪) 때만 쓰게 됐다.
백립白笠이라는 이름은 갓을 싸는 싸개의 색에 따라 지어진 것이다.
상중(喪中)에 사용한 것이었으므로 일반적으로 갓에 수식하던 입식(笠飾)이나
입영(笠纓)은 늘이지 않았다.
민간에서는 갓이나 패랭이에 백지나 흰 헝겊을 둘러 사용하였다.
(3) 망건(網巾)
최고급 제품 재료는 사람 머리카락


머리가 길었던 조선 남자들의 경우 긴 머리를 단정히 한 뒤 갓을 써야 했다.
상투를 쓸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이마에 두르는 게 망건이다. 그물 모양과 닮았다는 뜻에서
망건網巾이라 이름 붙였다. 보통 말총으로 만드는데 최고급 망건은 사람 머리카락으로 만든다.
특히 경남 통영산을 좋게 쳤다고 한다. ‘곱소리’라 불리는 코끼리 꼬리털로 만들기도 했다.
중국에서 유래한 망건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몽고족의 풍습을 없애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청나라 때부터 변발 풍습이 유행하면서 더 이상 망건을 만들지 않게 됐다.
망건 생산이 중단되자 조선 망건이 중국에 역수출되는 일이 생겨났다.
중국에 간 조선 사신의 망건이 도난당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고 한다.
(4) 탕건(宕巾)
벼슬아치들이 갓 아래 받쳐 쓰던 관


엘리자베스 키스-[두 명의 학자]
흔히들 ‘감투 쓴다’는 말을 쓴다. 공직이나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쓰는 말인데, 감투는 탕건의 다른 말이다.
탕건은 망건 위에 쓰는 모자로 망건을 덮어주고 갓의 모양을 잡아주는 기능을 한다.
탕건은 벼슬아치만 썼기 때문에 ‘감투 쓴다’가 ‘벼슬에 오르다’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고 한다.
중인 계층에서는 망건 위에 독립된 관모로 사용하기도 했다.
대나무·말총·삼껍질 등을 엮어서 만들고 옻칠을 하여 곱게 말려서 썼다.
〈경도잡지 京都雜志〉 풍속조에는 "사대부들은 평상시 거처할 때 복건·방건·정자관·동파관을 쓰고
조관(朝官)만은 따로 당건(唐巾)을 썼다"라고 했는데, 당건은 탕건인 듯하다.
이 기록에 따르면 탕건은 그 형태로 보아 복두·사모 따위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복두와 사모는 뒤쪽에서 좌우로 길게 뿔이 나 있는 데 비해 탕건은 뒤가 높고 앞이 낮아
턱이 져 있으며 맨 위는 반원형으로 평평하다. 값비싼 비단이나 삼베 등으로 만들면 파손되기 쉬우므로
질기고 쉽게 망가지지 않는 말총으로 만들어 썼다. 탕건 산지로는 제주도가 가장 유명하다.
(5) 상투관(上套冠)
서민층은 종이로 만들어 써



상투에 씌우던 작은 관으로 주로 왕과 사대부 집안에서 사용했다.
망건을 쓴 다음 그 위에 썼으며 작은 비녀를 꽂아 고정했다.
가죽·나무·뿔 등에 검은 칠을 해 만들었으며, 머리 정돈과 머리 장식품으로 썼다.
서민층이나 머리 숱이 적은 노인들이 사용한 관은 종이나 베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6) 면류관(冕旒冠)
왕세자 여덟 줄, 왕 아홉 줄, 황제 열두 줄
임금이 정복(正服)인 곤룡포를 입을 때 쓰는 관(冠)을 이르던 말.


순종 어진
왕은 그 지위상 모자도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왕과 왕세자가 즉위식이나 결혼식 등 큰 행사 때 쓰는 모자가 면류관이다.
면류관은 모자 위에 긴 판이 있고 앞뒤로 구슬을 꿴 줄을 달았다. 이 줄을 ‘유’라고 한다.
유를 몇 개 달아야 하는지는 『국조오례의』에 나와 있다. 왕은 아홉 줄, 왕세자는 여덟 줄을 단다.
그런데 구한말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유가 열두 줄로 바뀌었다.
중요한 행사 때 쓰는 모자인 만큼 많은 의미가 숨어 있다.
유에는 왕의 시야를 가려 악을 보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면류관 양 옆에 달린 작은 솜뭉치는 귀를 막아 나쁜 말을 듣지 말라는 뜻이다.
간신배들의 감언이설에 속지 않기를 바라는 뜻을 모자의 형상에 담아냈다.
(7) 원유관(遠遊冠)과 통천관(通天冠)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조정에 나갈 때 쓰던 관

위의 원유관은 1900년 의왕(의친왕 이강)이 친왕에 채봉될 때 썼던 관이다.

통천관을 쓴 고종 어진
원유관은 왕이 신하들의 하례(朝見)을 받을 때 착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세자나 왕세손 역시 중요한 국가의례에 원유관을 착용했는데, 원유관의 일부 장식과
중단 깃에 표현되는 무늬의 갯수, 그리고 손에 드는 규의 재료 등에 차이가 있었다.
황제는 원유관 대신 12량(梁)이 장식된 통천관(通天冠)을 썼다.
(8) 익선관 (翼善冠, 翼蟬冠)
왕이 평상시 국가 일을 볼 때 머리에 썼던 관.



전주 경기전에 소장된 태조 어진

영조 어진
익선관(翼善冠)은 조선시대 왕이 상복(常服)인 곤룡포를 입고 정무(政務)를 볼 때
머리에 쓰는 관으로 서연에서 왕세자, 왕세손의 강서복에도 썼다.
복두(頭)의 변형으로, 중국 송나라 때는 절상건(折上巾)이라 하였다가 명나라에서 익선관이라 하여
조선 세종 때 명나라 황제가 면복(冕服)과 상복의 일습에 끼워 보내면서 쓰게 되었다.
형태는 모체가 2단으로 턱이 지고 앞쪽보다 뒤쪽이 높으며 뒤에는 매미날개 모양의
소각 2개가 윗쪽을 향해 달려 있다. 이러한 날개형태 때문에 익선관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매미는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갖췄다' 하여
조선 시대 임금은 매미 날개 모양의 모자를 썼습니다.
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썼던 '오사모' 에도
매미 날개 모양의 장식을 달았습니다.
* 중국 진나라의 시임 육운(陸雲)은 매미를 다섯 가지의 덕을 갖췄다고 했다.
임금이 쓰는 익선관은 매미선(蟬)자를 쓰는데, 매미의 五德에 그 뜻을 둔 것으로 여겨진다.
(1)곧게 뻗은 긴 입모양이 마치 선비의 갓끈 같다고 해서 문(文)
(2)이슬과 수액만을 마신다 하여 청(淸)
(3)밭곡식을 축내거나 과일을 해치지 않아 염치 있다는 염(廉)
(4)제 살 집조차 없는 정도로 검소하다고 검(儉)
(5)허물을 벗고 죽을 때를 알고 지킨다 하여 신(信)
이처럼 매미는 군자가 갖춰야 할 <文, 淸, 廉 ,儉, 信>의 모든 덕목들을 두루 가졌다 하여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은 반드시 머리에 매미 날개를 쓰고 정사에 임했다.
임금이 정사를 볼 때 썼던 익선관은, '날개 翼'에 '매미 蟬'자를 써서 매미의 나는 날개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고, 신하들이 썼던 사모는 매미의 펼친 날개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는 다 매미의 五德을 기리며 몸소 구현하라는 뜻이다.

(9) 금관(金冠)
조선시대 관리들이 원단, 국경일, 대제례 때에 조복과 함께 착용하여
'금관조복'이라 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 심동신의 금관
금관은 조복에 갖추어 쓰던 모자로 양관(梁冠)이라고도 하는데, 량(梁)은
모자의 앞면에서 꼭대기를 지나 뒷면까지 연결되어 붙여진 금색선을 말하며,
그 수에 따라 계급이 구분된다. 이 금관은 5량관으로 1품의 관리가 쓰던 금관이다.
금관의 모양은 원통형인데 머리둘레와 뒷면 전체에 금칠이 되어 화려하고 윗부분은
검은 비단으로 싸여 있다. 뒷면은 금칠한 나무비녀 2개를 꽂아 고정하였고
비녀의 양끝에는 술을 감아 늘어 뜨렸다.

의친왕 차남 이우 공

대원군
(10) 사모 (紗帽)
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쓴 모자.


김정희 초상화

백사모-국상 때 문무백관이 쓰던 喪帽
모체(帽體)의 전면(前面)이 2층으로 둥그렇게 턱이 지고 뒤는 밋밋하며,
뒤 중심에서 양옆으로 날개[翼·角·脚] 모양이 달려 있다. 날개는 처음에는
연각(軟角)이었다가 점차 경각(硬角)으로 변화하였다. 1387년(고려 우왕13) 5월, 사신
설장수(偰長壽)가 명나라에서 돌아올 때, 명 태조의 하사품으로 처음 착용한 데서 비롯하며,
다음 달인 6월부터 1∼9품 관인들의 관모로 제도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18년(태종18) 1월부터 백관이 사용하였으며, 26년(세종8) 2월에
상복(常服)의 부속 관(冠)으로 제정된 후 1900년(광무4) 문관복이 양복으로 바뀔 때까지
조신들의 공식복장에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전통 혼례 때 신랑이 예모로 착용하며,
사모관대란 신랑의 정식예장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11) 정자관(程子冠)


이율곡 초상화


김윤식 대감(고종 때 외무대신)
조선시대 사대부와 유생들이 도포, 창의와 함께 집안에서 착용하던 관으로
말총으로 만들며, 형태는 2단 혹은 3단으로 전후좌우 봉우리의 기복이 있고 꼭대기는 터져 있다.
단층정자관, 2층정자관, 3층 정자관이 있는데 2층관은 높이가 약20cm, 3층관은 약 25cm 정도이며
조선후기까지 가장 널리 애용되었던 학자다운 풍모를 보여주는 관이다.
정자관은 주로 조선 말엽의 기록중에 나타나며 그 사용 예도 조선 후기에 한한다.
사실 조선 말엽의 정자관은 명칭만은 북송의 유학자인 정호, 정이 형제의 이름에서 연유되었으되
동파관이 변화하면서 생겨난 조선조 특유의 관모이다.
(12) 사방관 (四方冠)
조선시대 사대부나 유생, 선비들이 쓰던 관

원교 이광사(李匡師) 초상화
조선시대 사대부나 유생, 선비들이 한가히 집에 있을 때 쓰던 말총으로 만든 관.
아래가 좁고 위가 넓은 상자모양으로, 윗부분이 막혀 있다.

김홍도-[布衣風流圖]

겸재 정선-[독서여가]
(13) 유건(儒巾)
조선시대 유생들이 쓰던 예관. 검은 베로 만들었음

김홍도-[서화 감상]

유건(儒巾)은 조선시대 유생(儒生)들이 쓰던 실내용 건(巾)이다.
사인(士人)·성균관학생·생원 등의 유생들이 도포나 창의와 함께 쓰던 건으로,
민자건(民字巾) 또는 민자관(民字冠)이라고도 한다.
평상시나 향교·서원에서, 또는 제사에 참석할 때 쓰던 건이다.
검은 베나 모시·무명 등으로 만들며, 위쪽 좌우에 귀가 나 있고 갓끈처럼 끈을 달아
턱에 매도록 되어 있다. 뒷면은 반듯하게 서서 굽혀지지 않게 하고, 위를 조금 숙여서 앞면이 되도록 하면
남은 폭이 양쪽으로 벌어져 귀가 된다. 이 양쪽 귀를 반쯤 접어 판판하게 하면 '민(民)'자 모양이 된다.
(14) 복건(幅巾)
머리에 쓰는 관모의 하나


복건(幞巾)이라고도 한다. 1폭의 천으로 만들어 쓰기에 복건이라고 부른다.
머리 뒷부분은 곡선으로 하고 앞단의 귀 윗부분에 좌우 2개씩 주름을 잡되 아래 주름 속으로
끈을 달아 뒤를 돌려맨다. 겨울용으로는 흑단(黑緞)을 쓰고
여름에는 흑사(黑紗)를 썼으나 후대에는 흑갑사(黑甲紗)를 사용하게 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五州衍文長箋散稿〉에서는 "한(漢)나라 때 왕공들 가운데 선비들의 복장을
맘에 들어 하는 이들이 많아 복건 착용하는 것을 고상하게 여겨, 옛날에는 천자(賤者)의 복색이었던 것이
한말(漢末)에 와서 선비의 복색이 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원래는 고대 중국에서 관을 대신하여 쓰던 것이 후한(後漢)대에 유행하고, 진(晉)나라·당(唐)나라 때
은사(隱士)·도인(道人)들이 멋으로 썼다. 그후 유학자들 간에도 널리 쓰였으며
우리 나라에는 조선시대 주자학의 전래와 더불어 들어왔다. 한때 일부 유생들이
즐겨 쓰기도 했으나 차츰 줄어들어서 심의(深衣)와 함께 사용되거나 관례 때 초립(草笠)
받침으로 쓰였다. 최근에는 사내아이들의 돌 때 장식용 쓰개로 쓴다.
(15) 전립(戰笠)
품계가 높은 신분은 공작새 깃털이나 금으로 장식



철종 어진
역사 드라마에서 무관이나 포졸들이 쓰고 나오는 검은색 벙거지가 바로 전립이다.
품계가 높은 무관이 쓰는 전립은 '안올림 벙거지'라 하는데, 겉은 검정색 모직물, 안은
남색 운문단을 사용하고, 장식으로 공작새 깃털, 상모, 정자를 달고 밀화구슬로 끈을 달았다.
하급 무관들의 전립은 주로 값싼 돼지털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무관·포졸들이 쓴 조선시대 ‘철모’
짐승의 털을 다져서 일정한 틀에 넣어 만든 모자

엘리자베스 키스-[조선의 무관]
무관이 착용하던 전립은 패영이 달려 있고 입 위에 '술'이 달려 있으며
부드럽고 두꺼워 화살촉이 뚫지 못하였다 한다.
(16) 갈모(笠帽)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 쓰는 모자
갈모의 원래 이름은 갓모(笠帽)이며, 우모(雨帽)라고도 한다.


엘리자베스 키스-[갈모를 쓴 조선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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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모는 펼치면 위는 뾰족하여 고깔 모양이 되고, 접으면 쥘부채처럼 된다.
만드는 방법은 기름을 먹인 갈모지에 가는 대오리로 접는 칸살마다 살을 넣어 붙이고,
꼭대기에 닭의 볏처럼 생긴 꼭지를 단다. 비가 올 때 우산처럼 펴서 갓 위에 덮어 쓰고
갈모 안의 중간쯤 양쪽에 달린 실끈으로 턱에 매었다. 갓 없이 쓸 때는 갈모테를 쓴 다음에 썼다.
(17) 초립(草笠)
황색의 가는 풀이나 대오리를 엮어 만든 갓.


김홍도- [주막]
초립을 쓴 사람은 지금 열심히 먹고 있다.

오른쪽 사람이 초립동
옛날 사족(士族), 서족(庶族) 또는 나이가 어린 남자로 관례(冠禮)를 치른 사람이
쓰는 갓으로 누런 빛깔의 가는 대(竹)를 결어 만든다. 조선 초기에는 선비나 서인이 모두
초립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흑립의 일반화로 점차 관례를 치른 소년이
흑립을 쓰기 전까지의 관모로 쓰게 되어 초립동(草笠童)이라는 말이 생겼다.
초립은 패랭이와 비슷하나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원통형의 모옥과 양태로 되어 있으며
정수리가 평평하다. 재료는 주로 강화 교동에서 나는 황색풀을 사용하여 강화도
교동의 특산물이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대구, 경산, 영천에서도 산출된다 하였다.
(18) 패랭이(平凉子)
신분이 낮은 보부상, 역졸 등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사용



보부상 패랭이
더위를 피한다는 뜻에서 평량자(平凉子), 평량립(平凉笠)이라고도 한다.
대나무 껍질을 가늘게 쪼개서 위를 둥그렇게 만들었다. 같은 대나무 가지로 만들지만
실같이 가늘게 해서 만든 죽사립(竹絲笠)과는 전혀 다르다.
처음에는 서민들뿐만 아니라 사대부 층에서도 함께 썼으나 고급관모인 흑립(黑笠)이 나오자
신분이 낮은 보부상, 역졸 등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만이 사용하게 되었다. 역졸은 흑칠한 것을 썼고,
보부상들은 패랭이 위에 목화송이나 가화(假花)를 꽂고 끈을 매달아 머리에 고정시켰다.
(19) 삿갓
대오리나 갈대로 거칠게 엮어서 비나 볕을 피하기 위하여 쓰는 갓




엘리자베스 키스-[삿갓을 쓴 농부]
삿갓은 대오리나 갈대를 엮어 만든 갓으로, 비나 햇볕을 가리기 위해 쓰는 농립(農笠)
비 올 때 쓰는 우립(雨笠), 승려들이 쓰는 대삿갓, 서민층의 부녀자들이 쓰는 부녀 삿갓,
여승이 쓰는 가는 대살로 만든 세대 삿갓 (細竹笠) 등이 있다.
삿갓은 먼저 쓰는 사람의 얼굴을 가릴 정도의 길이로 대오리를 끊어 8mm정도로 쪼개어
다듬은 후 꼭지부터 엮기 시작해 끝으로 갈수록 점점 넓은 원추형으로 엮어 제작한다.
가장자리가 육각형을 이루도록 곱게 도련을 하고 안에는 미사리를 넣어
머리에 고정되도록 한다.
(20) 방립(方笠).방갓
상립(喪笠)이라고도 부르며 해가리개로 사용. 삿갓과 비슷하나
삿갓의 가장자리는 6각형, 방립은 4개의 꽃잎 모양으로 되어있다.



방립은 삿갓에서 변형된 형태로, 가늘게 쪼갠 대오리를 엮어 거죽을 만들고
안쪽에 왕골을 사용하였다. 가장자리는 육각형의 삿갓과는 달리
네 개의 꽃잎형(사화판형四花瓣形)으로 되어 있다.

상인(喪人)들이 외출할 때의 차림새
방립은 신라와 백제에서 일반인들이 사용하였다 하여 나제립(羅濟笠)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일부 관인과 서리가 쓰던 것으로 조선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나 향리만 썼을뿐
다른 사람은 꺼리게 되어 조선 후기에는 상인(喪人)의 쓰개로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상립(喪笠)이라고도 불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평민이 해 가리개로 사용하기도 했다.
(21) 벙거지
벙거지는 전립의 하나로
짐승의 털을 다져서 일정한 틀에 넣어 만든 모자


김홍도 -[행상]
낡은 벙거지를 쓴 남자 행상
벙거지를 쓴 가마꾼
벙거지는 조선시대 군노나 하인, 가마꾼 등이 착용하던 전립의 일종이다.
무관의 전립과 달리 하급 계층이 쓰던 벙거지는
아무 장식도 없이 간소하다.


농악패의 잽이들이 머리에 쓰는 모자도 벙거지 또는 상모라 부른다.
옛날 군사들이 썼던 전립에서 유래된 것으로
꼭지에 진자와 채를 달아 돌리면서 놀음을 한다.

김홍도-[무동舞童]
대금, 향鄕피리, 장고 연주자는 갓을 썼고,
해금, 세細피리, 북 연주자는 벙거지를 쓰고 있다.
(22) 휘항 (揮項)
조선시대 군병 또는 상류층 남자들이 쓰던 방한모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에 소장된 휘항
휘항은 남자들이 쓰던 방한모의 하나로, 호항(護項), 휘양(揮陽) 등으로도 불렀다.
머리 윗부분을 트며 뒤통수와 목을 두르는 짧은 것과, 어깨와 등까지 덮는 긴 것이 있다.
볼끼를 달아 목덜미와 뺨을 싸고 좌우에 끈을 달아 목에 맨다.
주로 상류층 노인들이 애용했는데 재료를 달리해 군복이나 군병도 썼다.
귀인은 담비가죽으로 만들었다.

심사정-책건우려(策蹇牛驢)
사람 몸무게를 감당 못해 비틀거리는 소와 나귀를 채찍질하며 유람에 나섰다.
두 사람 모두 죽립에 휘항을 쓰고 나섰다.

김홍도-[雪中行事]
겨울 아침, 도톰한 솜옷을 입고 휘항(揮項) 위에 갓을 쓴 양반이
길거리에서 전모를 쓴 기생들과 만나고 있다.

김양기-[투전도]
투전하는 사람들의 휘항이 횃대에 두 개, 자개 장농에 한 개가 걸려 있다.
한사람은 휘항을 쓴 채 투전에 열심이다.
<註> 긍원 김양기는 단원 김홍도의 아들이다.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는 "호항이란 이마를 두르는 털 머릿수건 같은 것인데
중국의 음으로 호(護)를 휘라 읽는다. 우리나라에서 이 말이 와전되어 휘항이라 하였다.
그 연원이 잘못됨이 이미 오래되었는데 본래 호항이지 휘항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註) [아언각비]는 1819년(순조19) 정약용(1762~1836)이 지은 책. 3권1책.
당시 널리 쓰이고 있던 말과 글 가운데 잘못 쓰이거나 어원이 불확실한 것을 골라
고증을 통해 뜻, 어원, 쓰임새를 설명한 책이다.

경복궁 흥례문을 지키는 수종장(무관 5품)과 정병이
모자 안에 휘항을 쓴채 근무하고 있다.
정병(중앙군의 정규병력) 수문장(무관 4품)
정조 때 편찬한 [추관지(秋官志)]에 의하면, 휘항은 융복에, 혹은 군병
또는 노인이 쓰는 것이라 하였는데, [정조실록] 정조 16년 1월 22일의 기록에서도
병사의 방한구로 휘항을 쓰게 하라고 전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