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용한 지식

의식주

"삶의공강" 2012. 3. 3. 20:33

출처: http://221.145.178.204/nrichdata/flk/book/file/NFF12_06.pdf

 

의 식 주
第四篇 衣 食 住
第一章 의 생 활 (衣 生 活)
尹 瑞 石
第1節 序言 第5節 復飾類
第2節 紡績 1. 평상복
1. 삼베 2. 노동복
2. 무명 3. 어린이 옷
3. 명주 4. 禮服
4. 아랑주 第6節 特殊衣裳
第3節 裁縫 1. 머리수건
1. 바느질 그릇 2. 방한복
2. 바느질 3. 금침
第4節 染織 第7節 洗濯 및 다듬이질
第1節 서 언(序 言)
함경도 일대는 고장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겨울의 극한기에는 영하 30℃
가까이까지 기온이 내려가고 반면에 여름이면 영상 30℃까지 기온이 올라가므로 의복은
이같은 기온의 심한 차이속에서 방한과 방서의 기능을 담당하여야 필수품의 하나였을
것이다. 「금철기관(金鐵奇觀)」(1870년 북병사(北兵使)로 부임했덩 조신희(趙辛熙)의
서(書))에 마천령(摩天嶺)에 오니 여기기 북관(北關)의 초계(初界)이라. ……이곳에
사는 사람은 모두 구유(狗襦)와 구고(狗袴)를 입고 있다. …… 그러나 여인은 이것을 입
지 않이한다 라 기술되어 있으며, 「이계집(耳溪集)」홍량호저(洪良浩著))에는 ……피
의(皮衣)는 겨울이나 여름 양계절에 모두 좋고, 혁말(革襪)는 수륙(水陸)을 겸할 수 있
다 고 북관지역(北關地域)에서 개가죽의 바지와 저고리가 상용되어져 있음을 알리고
한편으로 가죽옷과 가죽신의 특성을 알리고 있다. 한편 회령군지(會寧郡地)에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산간(山間)의 부락(部落)에는 개가죽의 바지 저고리가 오래 남아 있었고, 개
가죽배자(등걸이), 개가죽버선, 개가죽의 토수, 소가죽의 행전 등은 해방이후 시기에까
지 일부에서 착용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재가승부락(在家僧部落)이라고 하는 것은 여진족 재가승(女眞族 在家僧)이란 이름으
로 사람들이 사는 한 부락을 말한다. 함경북도지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부령 이북에 소
수가 있으며 이민족 상놈취급을 받아 온 한 무리이나 실은 이사람들은 반도안으로 영토
가 축소된 후에 반도안의 한인이 옛땅에 두고 온 동족들인 것이며, 근대까지 여진이라
알려진 사람들도 대부분 한인이 되었으나 그 중 일부가 아직도 구습을 지키며 사설사찰
(私設寺刹)에 살고 이들을 재가승(在家僧)이라 부르는 것이라 한다.
여하간 이들이 개가죽의 바지․저고리․배자 등을 입어온 풍습은 우리의 극히 북방에
살던 사람들이 방한(防寒)․방서(防暑)에 좋은 옷으로 상용하였던 풍습을 알게 하는 것
이다.
일반적으로는 옷감으로 명주․삼베․무명을 흔히 써왔고 면접한 이씨부인(李氏夫人 :
북청이 고향)의 말에 의하면 흰색을 가장 많이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재가
승부락(在家僧部落)의 풍습으로는 여자(女子)들이 옷의 색깔로 진한 색깔을 좋아하며
여름에도 진한 색을 많이 입었다고 한다. 진한 색깔 중에서도 청(靑)․홍(紅)․록(綠)․
흑(黑)등을 더욱 많이 썼으며 역시 여진족(女眞族)의 유습(遺習)일 것이라고 회령군지
(會寧郡誌)에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이 지방에서는 생활 형편에 비하여 주택과 복식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고 특히 외출(外出)을 할 때에는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한다.
대체적으로 평상시의 의복이 치수가 큰편이며 훌렁한 느낌으로서 저고리도 길고 버선
목도 길다. 추운 고장이어서 큼직하게 옷을 마르고 솜을 두둑하게 두어서 따뜻하게 입
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중부지방의 풍습에는 여자의 겨울의상으로 두루마기가
많이 쓰이는데 함경도에서는 추운고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루마기는 별로 입지 않았
으며 그대신 허리까지 내려오는 덧저고리를 많이 입는다.
第2節 방 적(紡 績)
함경도에서는 우리나라의 타지방과 마찬가지로 누에를 키워 명주실을 나아 명주를 짜
고, 삼을 키워 삼베를 짜고 목화를 심어 무명실을 나아서 무명을 짜서 옷감으로 썼다.
겨울철에는 주로 명주에 솜을 두어 겨울옷을 만들고 여름이면 삼베로 옷을 만든다.
1. 삼베
함경도의 삼베는 명산물의 하나이며, 특히 함경북도의 길주, 명천삼베는 아주 유명하
여, 진상으로도 올릴만큼 결이 아주 곱고 양질의 것이다.
(1) 삼베방적
삼베의 방적은 다음과 같다.
① 수확한 대마의 잎사귀를 제거하여 단으로 묶어서 말린다.
② 말린 대마를 흙가마에 넣고 찐 후 두들겨서 속이 깨지도록 강물(또는 우물물)에
헹구어 껍질만 남게 하여 말린다.
③ 다시 다발을 만들어 물에 두들기며 헹구어서 손으로 쪼갠다. 좋은 품질의 것은 가
늘게 쪼개진다.
④ 쪼개진 실을 이어서 물레를 이용하여 커다란 실타래로 만든다.
위와 같이 방적한 것을 잿물이나 양잿물에 삶아서 물에 헹구어 정련한 후 베틀에 짠
다.
2. 무명
목화를 따서 씨를 제거하고, 골고루 펴서 실을 만들어 삼베와 같은 방법으로 짠다.
3. 명주
단오(端午)전 대체로 4월중순경쯤 되면 군사무소(郡事務所)에서 누에알을 까놓은 종
이를 배분해 준다. 이것을 잘게 썰은 뽕나무닢위에 깔아놓으면 한번 두 번 먹을 때마다
눈에 뛰게 자라서 꼬물꼬물 움직인다. 뽕나무닢을 자주 먹이면 그만큼 잘 자랐으며 보
고 있노라면 참 재미스러웠다고 당시의 일을 회상하였다. (李氏夫人 75세) 처음에 위와
같이 하여 뽕나무닢을 먹인 후 5∼6일쯤 되면 잠을 잔다. 한잠을 자는 시간은 대체로
24시간이다. 잠을 자고난 다음에 다시 뽕나무닢을 먹고 다시 며칠 후에 두 번 잠을 잔
다. 두벌잠을 자고나면 껍질을 벗고 4잠을 자고 나면 4∼5일쯤 후에부터 꼬치를 짓는다.
처음에는 맑은 푸른 색이던 누에가 차차로 색이 변하여 누런색이 되면서 꼬치를 짓게
된다.
꼬치가 지어졌으면 이것을 뜯어 말린 다음 끓는 물에 삶아서 실을 거두어 올려 실을
낫는다. 실을 날때에는 무릅을 꾸부리고 무릅 위에 바가지를 덮어놓고 바가지 위에서
실을 나으면 잘 나아지고 무릅도 아프지 않았다고 말한다. 실을 나으면 수직조기에서
명주를 짠다.
명주는 폭이 약 40㎝이고 한필의 길이는 30척인데 1척의 자는 70㎝쯤 되는 것이었다
하니 현재쓰고 있는 50㎝길이의 자보다 (재래의 우리나라 침척자) 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릅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실을 낫는 풍습은 명주실을 낫는 풍습은 명주실을 나을 때
보다도 삼베실을 나올 때에 필요해서 시작된 것이라 한다.
4. 아랑주
명주실과 삼베실을 섞어서 짠 옷감을 아랑주 라 한다. 가로로 즉 올실을 건널 때
명주실을 4올짜다 삼베를 2올 놓거나 또는 6올, 2올로 교직한다. 혹은 날실을 끼울 때
명주실 사이에 2줄 또는 3줄로 삼베실을 섞어 끼워 세로 줄이 가도록 짠 것이다.
이렇게 짠 아랑주에 물을 들이면 삼베올과 비단올의 색깔이 농담(濃淡)으로 다르게
물들여져서 색다른 옷감으로 즐길 수 있었다 하며, 솜씨가 좋은 부인은 보기 좋은 아
랑주 를 짜두었다가 딸애기의 혼수로 또는 며늘아기의 예단으로 썼다고 말한다.
第3節 재 봉(裁 縫)
1. 바느질 그릇
여자들이 항상 곁에 두고 바늘, 실, 가위 등 재봉용구를 담아두는 바느질그릇(반지그
릇)은 보통 대나무에 색색으로 물을 들여 색을 맞추어서 짠 동그란모양의 것이다. 보통
동구리의 크기보다 좀크고 깊이가 약간 얕은 것이며, 실패는 나무로 만든 것, 나무로 만
들어 칠을 한 것을 쓴다.
2. 바느질
옛날에는 모든 바느질을 모두 손으로 꼬매었다. 바느질법으로는 홈질, 박음질, 반박음
질, 온박음질, 감침, 공구르기, 사뜨기 등이며 옷의 솔기를 부칠 때에는 보통 홈질법으로
하고, 치마단은 공구르기로 하며, 버선에 볼을 대서 기울때에는 감침법으로 하며, 여름
옷을 꼬맬 때에는 박음질법으로 한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들어와서는 재봉틀이 많이
보급되기 시작하여 보통 정도의 살림집에서는 모두 재봉틀을 준비하게 되었다.
여자의 옷을 꼬맬 때에는 치마는 보통 8폭으로 마르고(명주나 무명의 1폭이 대채로
37-40㎝정도) 저고리는 젊은층이면 6치, 노인은 7치 정도로 재단하였다. 남자의 저고리
는 키에따라 다르나 보통 1자를 넘었으며 치마, 저고리, 바지, 조끼, 마고자, 속옷의 바
느질법은 전국이 같은 것이었다.
第4節 염 직(染 織)
옷감으로 무명, 명주, 삼베 등을 모두 집에서 짜서 썼음으로 모두 흰색이었으므로 자
연히 집에서 물감을 들이는 일이 많았다. 단오절이나 추석, 설날이 가까워 오면 분홍,
남색, 옥색, 검은색 등으로 옷검에 물을 들여 아이들의 옷 준비를 하였으며 어머니나 할
머니는 손수 짠 옷감에 물을 들여 아이들에게 새옷을 해주는 것이 큰 락(樂)이었다고
말한다.
염색을 각 가정에서 들일 경우도 있고, 염색집에 부탁할 경우도 있다. 집에서 염색할
때는 다음과 같이 하였다.
각 천에 알맞는 염색염료를 구입하여 따뜻한 물(약 40∼45℃)에 염색할 천을 넣는다.
이때 염색하기전 염색천을 미리 물에 적셔서 얼룩이 생기지 않게 하였다.
검정색 등 짙은 색으로 염색할 때는 끓여야 한다.
염색들일 때 염료와 함께 소금, 식초, 백반을 넣는데 소금을 염색의 얼룩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용되며 백반은 퇴색하지 않기 위함이다.
염색할 천은 대나무로 꽂아서 팽팽하게 한 후 염료를 탄 물을 칠하기도 하였다.
염색한 천은 그늘에 말렸으며, 나중에 다듬이질을 하여 광택을 냈다.
염색할 때 용기로는 나무함지, 놋대야, 사기그릇, 커다란 질그릇 등을 사용하였으며,
커다란 질그릇을 버치 라 불렀다.
第5節 복 식 류(服 飾 類)
복식(服飾)은 크게 평상복(平常服)․예복(禮服)․상복(喪服)으로 나눌 수 있다.
개화기 이전에는 혼례를 치른 남자는 상투를 틀고 망건을 두른 위에 갓을 쓰고 혼전
의 총각은 머리를 땋아 내리고 끝에다 검정색의 작은 댕기를 드린다. 여자(女子)도 결혼
을 한 다음부터는 머리를 얹고 머리수건을 쓰지만 혼전에는 머리를 땋아 내리고 긴 다
홍색의 댕기를 드린다.
1. 평상복
(1) 남자의 평상복
남자의 평상복은 바지, 저고리, 마고자, 버선, 대님, 허리띠 등이며 여기에다 두루마기,
도포를 입고 토시를 끼고 행전을 친다. 두루마기와 도포․행전은 예복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으나 평소에도 인사를 받을 때 두루마기를 입고 외출할 때에는 두루마기 위에 도
포를 입는다.
옷을 입는 순서로는 먼저 속적삼(속독찌), 저고리, 조끼, 마고자순으로 입었으며. 하의
(下衣)는 속바지, 바지 순이고 바지에 대님을 친다.
여름에는 홑으로 지은 적삼과 고이(여름바지)를 입고 봄․가을에는 겹옷으로, 겨울에
는 솜을 넣어 누벼서 입었다. 부유층에서는 마고자 속에 털을 넣어 입기도 하였다.
외출시 남자는 반드시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버선은 노인(老人)들이 많이 이용할 뿐이
고 보통 양말을 신었다,
남자의 저고리, 조끼, 마고자의 길이는 약 60∼70㎝로서 허리를 덮고, 섶․깃은 약 7
㎝가량으로 넓직하며 동정은 4㎝가량의 나비이다. 저고리의 도련선이나 소매부리는 대
체로 직선에 가깝게 접되 약간의 곡선을 이루게 한다.
겨울에는 명주․무명 ․양단․모직 등으로 짓고 명주․무명․양단에는 솜을 두고 솜
을 두어 누빌때에는 명주를 쓴다.
토시는 겨울에는 방한용이 되고 여름에는 통풍용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겨울용 토시
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비단으로 짓고 솜을 두며 혹은 토시안에 털을 대는 경우도 있다.
여름에는 가는대로 성글게 만들어 적삼안으로 끼면 적삼이 살에 붙지 않으나 별로 많이
쓰이지는 않았다. 봄, 가을에는 겹으로 토시를 지었으며, 남자뿐 아니라 여자노인도 방
한용으로 토시를 낀다,
(2) 여자의 평상복
여자의 평상복은 겉옷으로는 치마, 저고리, 배자를 입고 버선을 신는다. 속옷으로는
속바지, 단속곳을 입는데 속바지의 속에다 T자형 으로 된 무명천을 만들어 입었으며
이것은 지금의 Panty와 같은 기능의 옷이라 할 수 있다. 겉저고리안에도 반드시 속적삼
을 입는다.
겨울에는 명주․무명․양단․하부다이 등으로 겉옷을 짓는데 솜을 두둑하게 두고, 때
로는 누비기도 하며, 배자안에는 털을 붙여 방한효과가 크도록 한다. 봄, 가을에는 겹옷
으로 짓고 여름에는 저고리를 박아지어서 적삼으로 만든다. 함경도에는 모시가 흔하지
않아서 여름 옷감으로는 삼베가 많이 쓰이는데 함경도의 삼베는 워낙 좋아서 굵은 모시
처럼 고은 것이 많고 살림이 넉넉할수록 고은 삼베를 많이 사용했는데 색깔이 매우 깨
끗하다.
①천의
평소에 여자가 외출할 때에는 치마길이보다 약간 짧게 만든 천의를 머리 위에서부터
쓰거나 또는어깨에 걸치기도 한다. 천의는 장옷처럼 여자가 내외를 하기 위한 것이 아
니고 방한용의 의상이라 하며 추운 겨울에는 천의를 풀솜을 얇게 두는 경우도 있다 한
다.
개화기 이후로는 천의는 없어지고 털실로 짠 숄 또는 모직으로 만든 숄을 쓰게 되었
다.
2. 노동복
여자는 평소에 입는 것보다 치마가 짧으며, 무명 앞치마를 둘렀다.
남자는 바지, 저고리만 입고 대님을 매지 않았다. 저고리의 길이는 평상복보다 길었으
며 끈을 뒤로 한번 돌려서 묶는다. 남자 노동자들은 무릎아래에 행전을 항시 둘렀다. 길
이는 30㎝정도이었으며 삼베로 만든다. 이 행전은 일반인의 경우 상복(喪服)에만 사용
되었다.
3. 어린이옷
(1) 신생아의 저고리
갓 출생한 신생아에 입히는 저고리는 깃을 붙이지 않고 섶도 조금 붙여 편안하게 만
드는데 어른의 저고리처럼 고름을 달지 않고 굵은 무명실로 옷고름을 붙이는데 이때 아
기가 80세까지 수명장수를 하라고 축원하는 뜻으로 실고름을 8가락으로 한다.
배내저고리는 명주로도 만들지만 보통 융으로 만들었다.
(2) 두렁치마와 풍차바지
명주 2∼3폭으로 어른의 치마모양으로 만든 두렁치마를 저고리 위로 입힌다. 자리에
뉘었을 때 아기의 등이 편안하고 배를 가려주어 배를 따뜻하게 해 줄 수 있고 기저귀를
갈아 줄 때에는 편안하다. 융으로 만들고 명주에 솜을 두어 누벼 만들기도 하며 고은
무명으로 겹으로 만들기도 한다.
좀 더 커서 아장 아장 걸어 다닐 때쯤 되면 남자아기나 여자아기 모두에게 풍차바지
를 입힌다. 풍차바자는 앞은 보통 남자의 바지처럼 마루폭에 큰 사폭 작은 사폭을 꼬매
어 부치고 뒤쪽은 양쪽 마루폭에다 밑을 각각 달아서 양편이 갈라지게 꼬맨 다음 허리
를 달 때 여며달아 만든 어린이용바지이다. 뒤가 열어저치기 쉬워 변을 보거나 기저귀
를 갈 때 매우 편리하고 밑가랭이도 열려있어 편리하다.
4. 예복(禮服)
(1) 혼례복(婚禮服)
색시는 혼례식을 올리는 날 속속곳․속바지․단속곳을 입고 그위로 옥색으로 물들인
무명치마를 입고 그 위에 비단 청치마를 입고 그위로 다시 비단 홍(紅)치마를 입는다.
상의는 속적삼을 입고 금박을 찍은 연두색 삼회장 저고리를 입은 위로 원삼을 입는다.
초례가 끝나고 폐백을 드릴 때에는 원삼을 벗고 활옷으로 갈아 입는다. 북청에서는 활
옷 을 장옷 이라고도 말한다.
옥색치마, 남치마, 청치마 3가지를 함께 받쳐입는 풍습은 특수한 것이다. 북청이 고향
인 이씨부인(李氏夫人)은 초례날 남치마에 노랑 삼호장저고리를 입는다 하고 혹은 옥색
치마, 옥색저고리를 남치마와 노랑저고리의 안으로 바쳐입기도 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여러겹으로 여러색을 바쳐입는 풍습은 그만큼 정중함을 뜻하는 것이라 해석된다.
신랑은 혼례날 옥색바지, 옥색저고리, 남색의 조끼와 마고자를 입고 옥색두루마기를
입는 위로 청색의 관복을 입고 관대를 두르고 사모를 쓴다.
색시는 꽃갓신을 신고 신랑은 당혜를 신는다.
신랑의 혼례복과 신랑․색시의 신발은 거의 전국적으로 공통된 것이다.
①활옷
다홍색 비단으로 된 앞․뒤의 길과 소매에다 장수와 영생 부귀와 길복을 상징하는 목
단꽃, 연꽃을 중심으로 해서 물결모양, 바위모양, 불로초, 어미봉, 새끼봉 호랑나비, 동자
(童子)등을 겹수로 화려하게 수를 놓고 소매끝으로는 희색비단으로 넓은 한삼이 붙는데
흰색 한삼에도 수가 놓여있다.
활옷은 상류계급에서는 길한 의례 때에 입었는데 일반 서민은 혼례를 치를 때만 입을
수 있도록 규제되어 있었으며 전국적으로 신부의 혼례복으로 쓰인다.
②원삼
초록이나 연두색의 길에 같은 색으로 소매를 다는데 소매끝에다 다홍과 노랑의 색동
을 부치고 그 끝으로 흰색으로 넓은 한삼을 단다. 뒷길이 앞길보다 길고 소매는 넓고
나비 5㎝길이가 4-5m나 되는 긴 띠를 허리에 띠고 뒤로 맨다.
원삼은 대례복의 하나로 혼례복으로도 많이 쓰이며, 나라의 왕비는 노랑색원삼 또는
다홍색, 붉은 자주색의 원삼을 입었으나 일반 민가에는 초록, 연두색의 원삼만이 허용되
었던 것이므로 민가의 혼례에는 연두색원삼이 많이 쓰인다.
혼례 때 원삼을 신부의 예복으로 입히는 풍습도 전국적으로 공통된 것이다.
第6節 특 수 의 상(特 殊 衣 裳)
1. 머리수건
결혼을 한 부인은 머리를 올려 쪽찌고 그 위로 머리수건을 쓰는데 특히 장년이 되어
시어머니가 되었을 때 부터는 반드시 머리수건을 착용하였다. 모양은 어린이의 저고리
처험 작게 만들어 긴 끝을 둘러서 맸다. 그러나 저고리법이 차츰 없어지고 사각형의 천
을 그림과 같이 접어 썼다.
색상은 회색, 옥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천의 종류로 부유층에서는 여름엔 아사 겨울철
엔 명주로 하였으며, 빈민층에서는 여름에는 삼베, 겨울철에는 광목․무명으로 만들었
다. 이 머리수건은 잠자리에 들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착용하였다고 한다.
2. 방한복
(1) 남자방한복
조끼보다 좀 긴 것으로 배자 라고 칭한다. 길이는 엉덩이까지 오며 형태는 조끼와
같다. 조끼 속에는 털이나 가죽을 넣었으며, 단추로 여미지 않고 대신 가는 끈을 만든
다. 즉 단추다는 부분마다 끈을 달아 여민다.
(2) 여자 방한복
겹저고리 또는 덧저고리라 하여 길이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며 저고리와 모양은 똑같이
만드나 소매가 좀 길고 끝이 넓으며 배래가 일직선이다. 겹저고리 속에도 털을 넣어서
만들며, 털 넣은 것이 소매 끝에 약간 나오도록 만든다.
(3) 남바위
겨울이면 남자와 어린이는 방한용으로 남바위를 쓴다.
남자 어른용 남바위는 검은 비단으로 만들고 안에 털을 댄다. 어린이용은 보통 남색
비단으로 만들고 안에 털을 댄다. 남바위를 쓰면 귀와 볼이 가려지고 머리 뒤에서 뒷목
까지 덮어진다. 머리 위의 정수리의 부분은 약 10㎝ 가량이 터져 있다.
3. 금침
추운 고장이어서 금침(침구)에는 특히 유의하여 솜을 두껍게 둔다. 이불은 연두나 초
록갈에 다홍깃을 단 것이 여자용이고 자주에 남길을 단 것이 흔히 남자용이며 명주에
연두․꽃분홍 등의 물감을 들어 안팍을 모두 비단으로 하고 솜을 두어 천예이불을 만든
다.
특히 혼례 때에는 긴 원앙침(원앙새를 수놓은 벼개마구리를 부친 벼개)을 신부측에서
준비하는데 이 벼개속에는 반드시 쌀을 넣는다. 벼개가 커서 쌀이 3말이 들어간다 하며
이 쌀은 시댁으로 간 다음에 꺼내어 팔아서 신부의 사재(私財)가 된다 한다. 쌀을 꺼낸
다음에는 메밀껍질로 바꾸어 넣는다. 벼개에 쌀을 넣어가지고 가서 이것을 팔아 사재로
하는 관습은 시집가는 딸에게 용돈을 들려주는 것과 같은 애정이 담긴 풍습으로 여겨진
다.
第7節 세 탁(洗 濯) 및 다듬이질
참나무재를 겨우내 독에 모아 두었다가 소쿠리에 넣고 물을 부어 잿물을 받아 이 물
로 빨래를 한다. 그 후 양잿물이 나오면서 세탁도 수월해졌으며 표백효과도 커졌다. 삼
베와 무명은 잿물과 양잿물로 빨래를 하였지만 명주는 뜨물과 비주를 사용하여 빨았다
고 한다.
다듬이돌은 박달나무로 만든 것, 돌로 만든 것 등이 쓰인다.
명주옷을 많이 입는 고장이어서 명주 빨래를 하여 고은풀을 먹이고 반들 반들 윤이
나도록 다듬이질을 하는 일은 여인들의 큰 책무의 하나였으며,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다
듬은 명주옷감을 만지면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럽고 때도 쉽게 타지 않는다.
第二章 식 생 활 (食 生 活)
尹 瑞 石
第1節 序言 2. 어린이의 돌날
第2節 日常飮食 3. 婚禮飮食
1. 主食 4. 喪․祭床飮食
2. 副食 제5절 床차림
3. 장류 1. 日常食
第3節 別食과 時食 2. 儀禮食
1. 別食 제6절 주방 用具
2. 時食 1. 주방의 모습
第4節 儀禮飮食 2. 食器類
1.첫국밥
第1節 서 언(序 言)
함경도는 전국 13개도 중에서 비교적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에 인구의 밀도
가 작은 편이어서 호당별(戶當別)로 볼때에는 농산물의 경작면적이 넓다. 경작면적 중에
서는 논이 작고 밭이 넓어 논농사보다 밭농사의 곡물산출량이 많고 밭농사 중에서는 보
리농사와 콩농사의 비율이 크며 기타 잡곡으로 조․수수․메밀․피 등 여러 가지를 산
출하고 있다. 특히 함경북도에서는 두류농사(豆類農事)가 성행하고 두류(豆類)의 종별
(種別)로는 대두(大豆)․소두(小豆)․채두(菜豆)․완두(豌豆)․녹두(綠豆)의 순서로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농경배경은 이 고장의 음식개발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일상
주식(日常主食)을 위시하여 떡만들기 등에서 맛이 좋은 차조나 차수수가 잘 활용되어
있다. 한편 좋은 콩을 많이 산출하는 까닭에 특히 장류가공에 마음을 많이 쓰고 콩 가
공음식인 두부요리도 여러 가지로 개발되어 보편화되고 있다.
한편 동해(東海)에 면한 연안지방(沿岸地方)은 천혜의 어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수
산물(水産物)이 풍부하며, 함경남도의 어획고는 전국의 어획고의 19.0%, 함경북도의 어
획고는 전국의 22.4%(이상 해방 이전의 수치임)를 차지하며, 수산물(水産物)의 제조고
(製造高)는 함경북도가 32.2%를 차지한다. 이러한 수산물자원(水産物資源)의 풍요성이
여러 가지 생선의 음식은 물론이고 각종 젓갈, 건어물의 조리 가공법을 개발하게 하여
함경도의 명물인 여러 가지 식혜와 명태순대 같은 향토음식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함경도가 알타이계 기마인의 이동경로로서 남한에 비하여 이른 시기에서부터 접근이
많던 고장이고 특히 고구려의 영토 아래에서 수렵이 성행하던 지역이지만 축산업이 크
게 발달되지는 못하였다. 그래도 남한지역에 비하면 일찍이 유축농업화(有蓄農業化)한
고장이라 할 수 있고 축우(畜牛)와 면양사육(緬羊飼育)을 주로 실시하였다.
음식조리법을 통관하면 대체적으로 간이 싱겁고 단백한 편이지만 채소음식보다는 생
선음식, 콩음식, 잡곡음식이 크게 개발된 까닭에 음식의 질적인 면에서 단백질성분이 농
후한 푸짐한 느낌의 것이 많다.
第2節 일 상 음 식(日 常 飮 食)
1. 주식(主食)
안씨의 말에 의하면, 함경도 지방의 토양은 비교적 남부지역보다 비옥하다. 그것은 기
후가 겨울철이면 삼한사온의 변화가 철저할 정도로 분명하게 순환되고 특히 추울때의
기온이 영하 30℃가까이(-20∼-29℃)내려가므로 토양속의 병균, 병충이 추운 날씨로 인
하여 사멸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또한 여름철 우기에 홍수로 인한 논․밭의 피해도
극심하지 않다고 한다.
주식으로는 쌀밥, 기장밥, 조밥, 기타 잡곡밥 등이 상용된다.
쌀알이 굵고 풀기가 많으며 이 밖에 좁쌀, 기장쌀도 끈기가 많아 기장밥은 별식으로
먹으며 고소하여 생것으로도 먹는다. 옥수수도 쪄서 과일 먹듯이 별식으로 먹으며, 먹고
남은 것은 가축의 사료로 이용된다.
2. 부식(副食)
(1) 국․찌개
평상시에는 쇠고기국과 해산물을 이용한 국을 많이 끓이나, 명절에는 미역국을 먹는
다.
쇠고기국은 육계장보다는 고춧가루를 적게 넣은 상태로 무를 첨가하여 끓인다. 그러
나 해산물인 경우 비린내가 덜 나는 가재미, 이면수, 우래기 등은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생선 고유의 맛을 살리나 비린내가 나는 생선은 된장을 넣어 끓인다.
찌개는 계절에 따른 야채와 돼지고기 된장을 넣고 끓이며, 겨울철엔 막김치를 넣는다.
국이나 찌개요리 중에서 몇가지 특수한 것을 들으면 다음과 같다.
① 미역국
좋은 미역이 많아 미역국을 자주 끓인다. 미역국을 끓일 때에는 생굴․대합조개를 넣
어 끓이는 경우가 많고 신선한 납새미를 넣어 끓이는 경우도 많다. 함경도에서는 닭고
기를 별로 쓰지 않는다.
② 함흥의 보신탕
보신탕의 원고장은 함흥이라 한다. 본 조사보고서 의생활(衣生活)에서 함경도의 추운
고장에서는 옛날에 개가죽바지, 개가죽저고리 등을 겨울이나 여름을 통하여 많이 입었
다는 옛날의 풍습을 소개한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개를 많이 키웠음을 알게 하고 개
가죽을 많이 이용하였다면 개고기를 식용에 많이 활용하였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따
라서 함흥 일대는 개장국의 본고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장국을 끓일 때에는 먼저 개고기를 통째로 폭 고아서 살을 손으로 찢는다. 칼을 대
서 써는 일은 절대 없다.
알맞게 짼 개고기에 마늘다진 것을 듬뿍 넣고 파 썬 것을 넣어 간장․고추가루․후추
가루 등으로 조미하는데 고춧가루는 반드시 간장에 불쿠어서 넣는다.
조미한 고기를 그릇에 담고 그위로 끓여 놓았던 맑은 국물을 붓는다. 즉 조미한 고기
를 국물에 다시 넣고 끓이지 말아야 하며 이점이 보통 육개장 끓이기와 다른 점이다.
개장국은 여름 한때의 보신용음식으로 쓰이며 잔치때에 끓이는 음식은 아니다.
③ 다시마 냉국
함경도의 다시마는 살이 두껍고 물에 불쿠면 매우 부드럽고 맛이 좋은 명산물의 하나
이다. 이 다시마를 마른행주로 깨끗하게 닦은 다음 냉국을 탈 깨끗한 물에 담가 맛이
우러나도록 한다. 맛이 알맞게 우러났을 때 다시마를 건저서 실처럼 가늘게 썰고 국물
을 맑게 바친다. 신성한 애오이를 가늘게 채로 썰어서 간장에 양념한다. 다시마국물에
다시마 채썬것과 애오이 양념한 것을 함께 띄우고 간장과 식초로 간을 맞추고 고춧가루
를 식성에 따라 좋을대로 넣어 시원하게 하여 마신다.
④ 전물찌개
물이 좋은 생선에다(그때 그때 어떤 종류라도 무방함) 물만 부어 먼저 끓인다. 펄펄
끓어날 때 소금․마늘․파를 넣어 간을 맞추어 한소큼 끓인다. 물이 좋은 생선 고장의
음식다운 간단한 조리법에 담백한 맛의 찌개라 할 수 있다.
⑤ 동태매운탕
함경도의 명물인 생명태를 깨끗하게 손질한 다음 파 썬 것, 마늘 다진 것, 고추장으로
생선에 간이 배이도록 조미한다. 한편으로 소고기로 맑은 장국을 끓여 팔팔 끓을 때 조
미한 생명태를 넣고 파를 채썰어 넣고 끓이면 다시없이 국물이 시원하고 맛이 깨끗하
다.
⑥ 이면수찌개
지금 서울에서는 이면수로 찌개를 끓인다면 얼른 납득이 가지 않겠으나 펄펄 뛰는 갓
잡은 이면수에 애호박․풋고추를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하여 찌개로 끓이면 맛이 시원하
고 생선의 맛이 달 정도로 좋다 한다.
⑦ 천렵국
강가에서 민물고기를 잡아 그 현장에서 천렵국을 끓인다. 먼저 돼지기름을 녹혀 배추
를 크게 썰어 볶다가 물을 붓고 끓이다가 된장, 고추장으로 간을 하고 다시 쇠고기를
넣는다. 끓어날 때 생선을 넣고 깨소금 통고추를 넣고 달걀을 푼다.
(2) 김치
김치에는 겨울의 김장김치로 배추통김치, 석박지, 깍두기가 보편적인 것이고 여름철에
는 오이소백이를 한다. 이외에 고추의 매운 맛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갓김치가 별미이
고 무청은 김치에 쓰지 않으나, 서울에 와서 무청을 쓰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였
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북청 양화 해변이 고향인 노인의 말씀) 무청은 절대 않쓰는 것
이 관례인 듯 하다.
김장의 시기는 중부지방과 마찬가지로 입동일(立冬日) 전후해서가 적기라 한다. 김장
을 할 때에는 배추를 소금물에 절이지 않고 바닷가에 나가서 바다물에 절였다가 그 자
리에서 씻어 소쿠리에 담아 들고 들어와서 배추속을 넣었다 한다. 바다물에 절이면 간
이 알맞고 단맛이 빠지지도 않아 좋았다 한다(북청 양화 해변 거주).
진한 소금물에 절인 것을 맹물에 담가 놓고 씻은 것에 비하면 성분의 유출이 크게 방
지 될 수 있겠으며 한편 바다물의 염도(鹽度)는 변화가 없겠으니 해마다 배추절이기의
염도(鹽度)가 일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이 맑은 동해연안(東海沿岸)에서나 있을 수
있는 풍습일 것이다.
바닷가에서 먼 지역인 농촌의 경우 소마차에 배추를 싣고 바닷가로 와서 절인 후 다
시 운반한다.
① 통김치
김치속의 양념으로 무, 파, 마늘, 생강, 고춧가루 등이 쓰이며 명태, 도루목(은어), 돼
지고기 등을 많이 섞어 넣는다. 젓갈류는 새우젓을 많이 이용한다. 생선은 좀 작은 것을
선택하여 칼집을 넣어 통채로 사용하며, 돼지고기는 삶아서 손바닥 크기만 하게 썰어
넣는다.
김치속에 미나리는 별로 쓰지않고 갓도 별로 많이 쓰지 않는다. 그러나 함흥 근교에
서 갓만으로 담그는 갓김치는 시원하고 별미롭다.
김치속에 명태, 대구 등을 많이 섞어 넣는데 이때에는 생명태나 생대구를 그대로 또
는 약간 소금간을 하여 꾸둑 꾸둑하게 말려 두었다가 김장을 버무리는 전날에 물에 담
가서 불쿠고 물끼를 닦은 다음에 뼈를 모두 빼고 토막으로 썰어서 김치속을 넣을 때 사
이사이에 끼운다. 생명태나 대구를 그대로 넣으면 푸석하고 물러지기 쉬워 금물이라 한
다(북청).
김치국물을 붓는데 김치국물은 바다물을 길어다 그대로 쓴다고 한다(북청). 바다물을
그대로 부으면 간이 알맞고 맛이 시원하다하며 배추 절이기, 씻기, 김치국물 등에 다다
물이 그대로 잘 활용되고 있는 점이 큰 특징이다.
② 갓 김치
신선한 갓에 소금으로만 간을 하고 국물을 부어 담근 갓김치는 시원하고 매우 맛이
좋아 속담에 셋이 모여 갓김치국물에 국수를 말아서 먹노라면 그중의 한사람이 갑산(甲
山)으로 가도 모를정도라 한다. 갓김치를 담글 때 수들수들하게 된 배추꼬랭이를 숭숭
썰어서 섞으면 국물의 빛깔이 마치 오랜지색과 핑크색의 중간정도의 고운색으로 우러난
다.
③ 채칼김치
채칼김치는 무를 채썰어서 소금에 잠간 절였다가 꼭 짜서 고춧가루, 마늘 다진 것, 생
강 등으로 버무린다.
한편으로 동태나 대구의 살을 먹기에 알맞게끔 썰어 소금간을 삼삼하게 하면서 고춧
가루와 마늘 다진 것으로 버무린다.
무 버무린 것과 생선 버무린 것을 함께 섞어서 항아리에 담고 꼭 눌러두었다가 알맞
게 삭으면 먹는다.
④ 쑥갓김치
쑥갓김치는 별미김치의 하나로 입맛이 없을 때 별미로 먹는다 한다.
쑥갓을 삼삼한 소금물에 5∼7일간쯤 담근다. 한편으로 무와 배추꼬랭이를 얇게 납작
한 모양으로 썰어서 역시 소금물에 절였다가 베보자기에 싸서 돌로 꼭 눌러 물끼를 짠
다.
소금물에 담가 삭힌 쑥갓을 살살 흔들어 씻어 물끼를 뺀 다음 무와 배추꼬리 절인 것
을 함께 고춧가루, 젓국, 마늘 다진 것, 파 다진 것, 생강 다진 것, 실고추 등을 넣어 버
무려 작은 항아리에 담아 꼭 눌러둔다.
알맞게 익으면 통깨 볶은 것을 위에 뿌려 대접한다.
⑤ 물김치
통김치를 할 때 떨어진 배추를 모아서 물김치로 담그며, 여기에 무도 크기에 관계없
이 적당히 썰어서 고춧가루, 소금을 넣고 버무린 다음 국물을 붓는다.
물김치는 막김치의 하나이다.
⑥ 대구깍두기
대구를 넣고 담근 깍두기이며 맛이 매우 시원하다고 한다.
대구를 깨끗하게 씻어서 소금에 절였다가 물끼를 빼고 뼈를 빼 알맞게 썬다.
무를 깍뚝썰기로 썰어서 대구와 함께 마늘, 파, 고춧가루로 버무려 20∼30일간 삭힌
다. 먹을 때에는 대구는 따로 담아 놓는 경우가 많다.
⑦ 콩나물김치
콩이 좋은 고장이어서 콩나물도 좋다. 이른 봄철에 채소가 귀할 때 콩나물의 뿌리를
다듬어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차게 식힌 다음 파 썬 것, 실고추, 마늘로 살살 버무려
삼삼한 소금물로 국물을 부어서 잠간 익히면 국물이 시원하고 입맛을 돋꾼다. 특히 길
주(吉州)에서 나는 콩으로 길은 콩나물이 좋다 한다.
(3) 밑반찬
우리나라에서 언제든지 꺼내어 밥반찬에 쓸 수 있도록 밑반찬을 상비해두는 풍습은
어느 고장에서나 공통적인 것이다.
함경도지방에도 여러 가지 밑반찬류가 많으며 해산물 어물을 소재로 한 것이 더욱 많
다.
① 자반
마른 북어를 대구포처럼 잘게 찢어 발라서 참기름, 설탕, 고춧가루, 참깨 등의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 상에 올린다.
② 멸치․꽁치 절임
멸치나 꽁치를 장독에 넣고 소금을 뿌려서 겨울철에 절여두었다가 여름철이 되면 꺼
내어 조리하여 찬밥과 함께 시식한다.
③ 도루목 절임
도루목도 겨울철에 소금으로 절인 후 봄이 되면 꺼내어 국을 끓인다. 즉 도루목을 물
에 헹구어 짠기를 다소 제거한 후 무, 풋고추, 두부를 썰어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끓인 다음 고춧가루를 조금 넣어 먹는다.
④ 장아찌
된장속에 무, 풋고추, 오이, 마늘(마늘은 마늘대까지 먹을 수 있을 때 통째로 먹는다)
등을 넣으며 주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다.
⑤ 호박․가지․무우청 말림
호박, 가지, 무청(씨래기) 등을 가을철에 말려두었다가 사용하며, 무청은 돼지고기 등
을 넣어 된장국을 끓이기도 한다.
⑥ 두부장
콩을 많이 산출하는 고장이어서 두부를 많이 만드는데 각기 가정에서 두부를 많이 만
들었을 때 무명이나 삼베로 작은 자루를 만들고 여기에 두부를 넣어 꼭 짜서 물끼를 뺀
다음 다시 삼베줌치(삼베주머니)에 넣어 꼬맨 다음 막고추장 항아리에 박어 삭힌다. 이
때에 마늘쫑을 함께 넣어두면 더욱 맛이 좋다 하며, 쌈을 먹을 때 이 두부장을 함께 싼
다.
(4) 식 혜
함경도의 밥식혜는 이미 널리 알려저 있는 명물이다. 이 고장의 특산물인 생선과 메
조밥을 소재로 한 매우 합리적인 것이다.
식혜의 재료는 동해안의 참가재미가 가장 좋으며 이 밖에 동태나 도루목도 사용한다.
만드는 순서 및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싱싱한 가재미를 주재료로 하며, 이 때 큰 가재미가 맛이 있긴 하나 대체로 잔 것
을 많이 한다. 가재미는 내장을 아가미를 통하여 전부 제거한 후 칼집을 내어 소금을
뿌려 하루 정도 그늘에 둔다.
② 꼬들꼬들해진 가재미에 조밥(메조밥) 식힌 것과 고춧가루, 마늘, 생강을 켜켜로 넣
고 꼭 눌러둔다. 이 때 고춧가루를 아주 듬뿍 넣어야 맛이 좋다.
③ 이틀 후 무를 굵게 채 썰어서 소금에 절여 물기를 조금 제거한 것을 가재미 절인
것에 넣는다.
④ 담근지 일주일이면 시식할 수 있으며, 식혜는 주로 술안주로 인기 있다. 이 때 술
은 소주, 막걸리를 곁들인다.
위의 방법보다 조금 빨리 먹기를 원한다면, 가재미를 소금에 절이지 않고 고춧가루만
켜켜로 듬뿍 넣고 하루정도 둔다. 하루가 지난 후 조밥과 갖은 양념을 해두고 가재미를
꺼내어 버무리며 이때 소금을 넣고 간을 한다.
(5) 젓갈
함경도의 명물 젓갈에는 명란젓, 창란젓이 대표적인 것이다.
명태가 많은 고장이어서 각기 가정에서 신성한 알을 모아 젓을 담근다.
먼저 명태의 알을 뽑아서 소쿠리에 담아 물끼를 뽑은 다음 소금을 뿌려 2∼3일간 절
였다가 다시 소쿠리에 건져 물끼를 뺀다.
고춧가루, 생강, 마늘을 다져서 소금간을 한 다음 이 양념에 명란을 하나씩 굴려 버무
려서 항아리에 차곡 차곡 담는데 고춧가루와 소금의 분량은 기호에 맞추어 조절을 한
다.
창란젓은 명태의 창자를 뽑아서 속을 깨끗하게 뽑아내고 자루에 담은채로 돌로 눌러
창자가 꼭들어붓도록 한 다음 물끼를 빼서 소금에 절인다. 한편 무를 1㎝ 나비에 0.5㎝
정도의 두께로 썰어 소금에 약간 절였다가 창란젓에 함께 섞는다. 먹을 때에는 다시 양
념을 한다.
(6) 기타 반찬음식
즉석에서 만드는 반찬음식류에는 계절에 따라 고장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으나 대체
로 나물, 생선구이 또는 지짐 등이 많이 쓰이고 돼지고기는 삶아서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으며, 소고기는 산적구이로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청진 근교에서는 소고기, 돼지고
기, 닭고기 등을 그대로 김을 올려 푹찌는 경우가 많다 한다. 즉석으로 만드는 반찬음식
중 몇가지를 다음에 예로 든다.
① 두부회
펄펄 끓는 물에 두부를 큰것채로 넣어 찬기운이 가실 정도로 익혀 큼직하게 토막을
썰고 뜨거울 때 삼삼한 양념장을 부어 대접한다.
② 생선지짐
명태, 대구, 도루묵 등을 제철에 많이 사서 독에다 삼삼하게 절여두고 항시 언제나 꺼
내어 간장, 파 마늘로 양념하여 물끼를 조금 넣고 지지거나 밥솥안에서 찐다.
또는 절였던 생선을 반건(半乾)하여 굽는다.
3. 장류
장류는 우리나라의 기본조미료이므로 어느 고장에서나 장 담그기와 장독 간수에 마음
을 많이 쓴다.
(1) 간장
함경도에서는 대체로 음력 정월(正月)에 메주를 쑤고 4월중순경에 장을 담근다(북청
에서). 메주쑤기와 장담그기의 시기는 주변의 기온에 따라 조절되는 것이며 북청의 장
담그기의 시기는 서울에 비하면 약 2개월 늦는다.
장을 담글때에는 물 1동이(10 승(升))에 콩 2.5승(升)∼3승(升) 가량으로 쑨 메주와
소금 1.7승(升) 가량의 비례로 한다(북청지방). 비교적 물에 비하여 메주의 분량이 적고
소금의 분량도 적다.
특기할 것은 장을 담글 때에 바다물을 쓰는 경우가 많으며 바다물에 장을 담글 때에
는 바다물 1동이에 소금 0.5승(升) 만을 더 풀어서 쓴다(북청지방).
(2) 된장
장을 담가 간장을 뜨고 남은 메주를 건져 된장으로 한다.
(3) 고추장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고추장 담그기와 마찬가지로 메주가루, 고춧가루, 쌀가루, 소금
으로 담그나 서울지역에 비하면 쌀가루를 훨씬 적게 쓰고 메주가루를 많이 쓴다.
(4) 함경도(함흥 근교)의 막장
함흥 근교에서 담그는 막장은 콩메주가루와 소금만으로 담그는 점이 이채롭다. 쌀이
나 기타 녹말성 식품을 전여 섞지 않으며 고춧가루도 넣지 않는다.
콩메주가루에 소금물만을 넣어 담근 것이므로 경상도지역에서 보리를 소재로 하여 담
근 막장과는 다른 개념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며 맛있게 담근 단용(單用)된 장(간장을
빼지 않은 된당)이라 생각해야 할 것이다.
第3節 별 식(別 食)과 시 식(時 食)
1.별식(別食)
함경도의 별식으로는 이 고장의 좋은 차조로 만든 떡, 차수수로 만든 떡이 극히 보편
적이면서도 명물이라 할 수 있고 널리 알려져 있는 명태순대 도 다른 고장에는 없는
음식의 하나이고, 생선회를 맵게 조미하여 국수위에 얹은 회냉면 은 함경도의 별식으
로 손꼽는 것의 하나일 것이다.
(1)찹쌀전병
찹쌀을 물에 담갔다가 건저 가루로 빤다음 삼삼하게 소금간을 하여 지름이 15㎝ 가량
되게끔 얇팍하게 전병을 부친다. 이 전병 한 장 한 장에다 속을 싸서 도르르 말아 그릇
에 담아 대접하는데 매우 감칠맛이 좋다.
속으로는 소고기를 다지거나 가늘게 채썰어서 파, 마늘, 간장, 설탕, 기름, 깨소금으로
조미하여 볶아서 쓴다. 또는 팥을 삶아서 어리미채에 내려서 곱게 한다음 설탕을 넣고
소금을 조금 가미하여 볶아서 촉촉하게 만들어 속으로 쓴다.
이렇게 찹싹전병에다 속을 넣고 도르르 만 찹쌀전병은 지름이 3㎝ 가량, 길이는 전병
의 지름(15㎝정도)대로의 긴 원통형의 모양이며 생일, 회갑잔치, 혼례잔치 등에 빼놓을
수 없는 떡이라 하며 평소에도 별식으로 한다.
(2) 차수수경단
차수수경단이라 부르지만 서울지역에서 만드는 것처럼 동글지 않다. 좋은 차수수를
물에 불쿠어 가루로 빤 다음 지름 10∼15㎝ 정도로 얇게 전병을 부친다. 이 차수수전병
한 장 한 장에다 앞서 설명한 찹쌀 전병에 넣는 것과 같은 속(소고기볶음, 팥소)을 넣어
서 반으로 접어 반달모양으로 만들거나 또는 도르르 말아서 가는 원통형의 모양으로 만
든다.
(3) 찰기장 인절미
좋은 찰기장을 불쿤 다음 무르게 찐 것을 안방이나 돌절구에서 매우 쳐서 인절미로
한다. 여기에다 계피팥고물을 도독하게 무치는데 찹쌀인절미에 비할 수 없이 고소하고
좋은 맛을 갖는 떡이라 한다. 계피팥고물은 팥을 타서 물에 담가 껍질을 문질어 제거한
다음 시루에 쩌서 소금간을 약간 가미하여 보슬보슬하게 체에 내려 만든다.
(4) 쉬고전
수수가루를 내어 뜨거운 물로 익반죽하여 직경이 약 15㎝, 두께가 5mm 정도의 크기
로 만들어 기름에 지진다. 기름에 지진 것을 반으로 접거나 둘둘 말아서 상위에 올린다.
(5)감자 떡
감자를 썩혀서 물을 넣어 앙금을 내린 후 시루에 얹혀 찐다. 이 때 콩을 넣기도 한다.
(6) 감주
빈독에 먹다 남은 쌀밥을 누룩과 함께 두어 발효시킨 다음 먹는다.
(7) 명태순대
생명태의 머리를 자르고 위에서부터 손을 넣어 내장을 모두 빼내고 뼈도 뽑아낸 다음
배추를 데쳐서 다진 것, 삶은 돼지고기 다진 것, 두부를 꼭 짜서 물끼를 뺀 것 등을 고
추장으로 간을 맞추고 갖은 양념으로 조미하여 명태의 배안에 가득 채우고 꼬매어서 꾸
둑꾸둑하게 반건(半乾)을 해두고 필요할 때면 굽거나 밥솥에 살작 찐다.
(8) 회 냉면
감자 녹말가루와 고은 메밀가루를 말랑말랑하게 반죽하여 분기계(국수 누르는 기계)
에 눌러 국수를 뽑는다.
생선을 회감으로 썰어서 고춧가루, 기름, 설탕 등으로 빨갛게 양념하고 오이, 배, 무,
파 등을 채로 썬다.
쇠고기로 맑은 장국을 끓여 간장으로 간을 하여 식히고, 국수를 삶아 대접에 담고 그
위에 생선회, 채썬 배, 오이, 무우, 파 등을 보기좋게 얹어놓고 삶은 계란을 썰어 얹어놓
는다.
여기에 고기장국 국물을 붓고 참기름을 치고 잣을 얹은 다음 얼음을 띄워 대접한다.
회냉면의 국수는 녹말가루가 많이 섞여서 국수가 매우 질기고 생선회의 맛이 신선하
면서도 매우 매운 것이 한 특징이다.
2. 시식(時食)
(1) 설날
설날에는 떡국을 하는 집이 많으나 반드시 떡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고장도
있으며, 떡국을 하지 않을 때에는 찰밥을 한다.
떡국으로 끓이는 훤떡은 멥쌀가루를 시루에 쩌서 뜨거울 때 안반에서 매우 쳐서 가래
떡으로 만들고 쇠고기로 맑은 장국을 끓여 훤떡을 썰어놓고 끓인다.
떡국 외에는 찹쌀인절미, 차조인절미 등을 하며 앞서 설명한 찹쌀전병도 한다.
여러 가지 과줄을 사오는 경우가 많다 하며, 설날의 음식으로서 일정한 규범이 엄격
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다.
(2) 정월 보름날
오곡밥을 한다.
(3) 단오날
함경도에서는 단오절(端午節)을 크게 일컬으며 가랍떡 등을 많이 한다.
① 가랍 떡
오월(五月) 단오(端午)나 초복(初伏)에 많이 만들어 먹는 떡이다. 즉 조찹쌀과 좁쌀
또는 옥수수가루 등을 혼합반죽하여 넙적하게 하고 가랍잎에 싸서 가마에 찌고, 먹을때
에 가랍잎(떡갈나무잎)을 벗긴다.
②쑥 떡
멥쌀가루에 쑥을 찌어넣고 절편을 만들고 찹쌀에 쑥을 섞어서 쑥인절미를 만들어 콩
고물을 무친다. 절편에 떡살로 문양을 내는 일은 별로 하지 않는다 하며 큼직하게 만들
어 위에 참기름을 무친다.
(4) 추석(秋夕)
추석날은 햇곡식으로 떡을 한다. 쌀로 시루떡을 찌고, 또는 절편을 만들고, 찹쌀로 인
절미를 하거나 또는 다음에 설명하는 장떡, 오그랑떡 등을 한다.
① 장 떡
귀밀장떡과 감자장떡의 두가지가 있는데, 재가승부락(在家僧部落)에만 있던 특이한 음
식이다. 귀밀장떡은 귀밀가루를 반죽하여 속에 양념한 된장을 넣어 일종의 만두처럼 만
들고, 가락잎 또는 옥수수잎에 싸서 가마에 쪄서 먹는다. 특히 추석(秋夕)에 햇귀밀쌀로
만들어 명절음식으로 먹는다. 특별히 만들 때에는 양념으로 돼지고기, 송이버섯 같은 것
을 된장에 섞어서 넣는다. 감자장떡은 햇감자가 나게 되면 흔히 감자장떡을 만드는데
대개 된장에 풋고추와 마늘을 썰어서 섞어 넣는다.
② 오그랑떡
조찹쌀, 좁쌀, 밥수수쌀 등의 가루를 반죽하여 햇닭알만큼 하게 동그라미를 빚어서 열
콩을 삶다가 그물에 넣어 끓여댄다. 떡물이 없이하여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5) 고사떡
가을에 추수를 거두어들인 후 고사를 지낸다. 고사떡은 멥쌀가루, 찹쌀가루에 붉은 팥
고물을 얹어서 켜를 지어 시루에 앉혀 찐다. 고사를 지내는데 술이나 돼지머리 등을 쓰
지 않는다.
(6) 겨울철의 명물음식
① 메밀국수
예로부터 메밀을 많이 심었으므로 메밀국수를 잘 만든다. 뜨거운 된장국에다 찬 김치
국물에 말아 먹는다. 특히 추운 겨울 뜨거운 온돌방에서 찬 김치국물에 말아먹는 메밀
국수는 별미(別味)이며, 매우 소박한 음식이지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겨울철의 음
식이다.
② 눈속에 묻어두는 돼지고기
겨울철이면 돼지고기를 큰 덩어리채로 삶아서 크게 몇 등분하여 눈속에 푹 묻어둔다.
이것은 겨울철의 밤참으로 쓰이는 것인데 눈속에서 적당하게 수축되어 꼬들꼬들하며 별
미라 한다.
필요할 때면 필요한 만큼 썰어다가 김치에 싸서 뜨거운 방에 모여 밤참으로 먹는다.
이때 메밀국수말이를 함께 먹는 경우가 많다.
함경도에는 밀국수는 별로 흔하지 않았다고 한다.
第4節 의 례 음 식(儀 禮 飮 食)
1. 첫국밥
첫국밥에는 미역국과 찰밥을 준비한다. 반드시 찰밥을 짓는 것이 첫국밥의 관례라고
하며 미역국에는 생국, 조개 등을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하여 끓이나 때로는 고장에 따라
서 된장으로 간을 하여 끓이는 경우도 있다.
2. 어린이의 돌날
어린이의 돌날에 특별하게 돌잡이상을 준비하지 않고 돌잡이의 풍습도 없다. 다만 차
수수경단을 하고 시루떡이나 인절미 등을 하며 추운 때에는 흰떡국을 끓여 나누어 먹으
며 축하를 한다.
어린이의 돌날이나 백일, 생일 등에 만드는 차수수경단은 수수가루를 익반죽한 다음
둥글게 빚어서 끓는 물에 삶아 건져 팥고물에 무친다. 어린이의 생일에 차수수경단에
붉은 팥고물을 묻치는 풍습은 액땜이 된다는 뜻으로 한다.
3. 혼례음식(婚禮飮食)
(1) 사주를 보낼 때
결혼식이 있기 전에 신랑이 사주를 적어 신부집으로 갈 때, 인절미와 절편, 술안주 등
을 가지고 간다. 이때 인절미는 고물없이 커다란 함지(보통 직경이 약 70㎝∼100㎝, 높
이가 30㎝정도)크기만 하게 만들어서 함지에 담는다. 절편 역시 길이는 함지크기정도이
며, 두께는 약10㎝로 하여 둥근 원기둥 모양으로 하여 아래 위를 조금 눌러서 담는다.
인절미 절편함지는 생활수준에 따라 그 크기도 다르며 또한 부유층일수록 떡도 많은
함지에 담아 보낸다. 심지어는 떡을 1가마니씩 하여 보내기도 한다.
(2) 혼례날의 음식
혼례식날에 사용하는 떡으로는 귀주떡(서울의 증편 과 비슷하다)이 가장 주된 음식
이다. 귀주떡은 잔치가 시작되기 며칠전부터 장만한다. 귀주떡의 크기는 보통 가로 30
㎝, 세로 30㎝, 높이 5㎝정도이다.
잔치날의 주식으로는 국수가 반드시 차려진다. 겨울철일 경우 따뜻한 고기장국에 말
고, 여름철은 찬국물에 말아서 낸다.
① 큰상
혼례날에는 신부․신랑에게 큰 상을 고요서 축하한다.
큰사에는 귀주떡, 절편, 인절미 등을 크게 만들어 수북하게 고이고, 돼지고기 삶은 것,
소고기 삶은 것, 큰 생선을 반건(半乾)하여 굽거나 찐 것, 여러 가지 과일과 과줄 등을
고이고 신부의 앞으로 장국상을 차려 국수를 말아 놓는다.
잔치나 큰일이 있을 때에 행적, 쇠고기 산적 등을 많이 한다.
② 행 적
실파를 7∼8㎝의 길이로 썰고, 삶은 돼지고기도 같은 길이로 조북하게 썰고 배추김치
도 같은 크기로 썰고 고사리도 같은 길이로 준비하여 간장 기름에 양념한다.
이것을 10㎝정도의 꼬쟁이에 꽂아서 밀가루를 가볍게 묻히고 달걀을 씌워서 기름에
전을 부치듯이 지진다.
③ 쇠고기 산적
쇠고기를 살고기로 골라서 어른의 손바닥만하게 두껍게 저며 잔칼집을 낸 다음 갖은
양념으로 조미하여 굽는다.
④ 잔치날의 술
함경도에는 막걸리, 약주 등을 거이 안쓰고 언제나 소주만을 썼다 한다. 소주는 쌀로
빚은술을 고아서 만든 것, 수수로 빚은 술을 고아서 만든 소주 등이 많이 쓰인다. 함경
도에서 소주를 많이 마시는 관습은 옛부터일 것이다.
(3) 폐백
폐백으로는 대추에 술을 뿌려 불쿠어 홍실에 길게 꿰여 고인 것, 쇠고기산적, 닭산적
등을 쓰는 고장도 있고, 대추나 고기산적을 특별하게 만들지 않고 절편이나 인절미를
크게 만들어 함지에 가득 하게 담고, 돼지머리를 삶아 동구리에 가득 담고 또는 시루떡
을 해서 함지에 가득히 담아 가지고 오는 경우도 있다(북청).
대체적으로 엄격한 격식에 따른다기보다 여러 가지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하는 것 같
다.
4. 상(喪)․제상음식(祭床飮食)
가까운 이웃이나 사돈집이 상을 당하였을 때는 팥죽을 쑤어 보낸다. 특히 사돈집의
상은 반드시 팥죽을 만들어 보낸다. 그러나 시골의 경우엔 팥죽대신 장국밥이나 떡국을
만든다. 이것은 시골 사람들의 식사량이 크기 때문일 것이라 한다. 한편 팥죽은 잡귀를
쫓기 위한 수단과 또 한편으로는 상(喪)을 당하여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많은 상객들에
게 먹기 편한 유동식 음식을 대접함은 합리적인 방법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젯상은 다른 지방과 별다른 차이점은 없으며, 이때 만드는 떡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조찰떡
조찹쌀을 떡구유에 쪄서 만든다. 찰떡은 떡 그릇에 담을 때에 주먹만큼 크게 베어 담
는다.
(2) 시루떡
시루떡 역시 조찹쌀가루와 기타 잡곡가루를 섞어서 열콩 부루개 를 놓고, 가마에
쪄낸 다음에 다시 함지에 대고 잘 주물러서 혼합시키고 칼로 베어 먹는다. 작은 제사에
는 조찰떡 대신 시루떡을 한다.
(3) 자바귀
재가승부락(在家僧部落)에만 있는 것으로 찰떡을 쳐서 밀대로 밀어 엷게 하고 기름에
구운 다음에 물엿을 바른 것이다. 이것은 과줄에 튀개쌀을 붙이지 않은 것에 해당한다.
큰 잔치나 제사때에 만들어 사용한다. 입쌀이 극히 귀하여 튀개쌀을 만들 수 없기 때문
에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이외에 젯상에 보통 무숙채를 준비한다는 것이 특이하다. 이 무숙채는 사람이 죽었다
는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에 상(喪)․제상(祭床)에는 차려지나 경사스러운 날에는 만들
지 않는다고 한다.
第5節 상(床)차림
1. 일상식(日常食)
식사는 항상 각상을 차려서 들며, 식사시간은 연령, 상하계층의 차이 없이 동일한 시
간에 먹는다. 단, 여자들과 노동층은 각상을 받지 않고 여러명이 함께 모여서 먹는다.
2. 의례식
혼례식에 차렸던 큰 상은 헐지 않은채 그대로 사돈집에 가져간다. 그러나 멀리 떨어
진 경우엔 음식을 커다란 소쿠리에 차곡차곡 담아서 소달구지에 실어 보낸다. 혼례식때
참석한 손님에겐 각상을 차려준다. 이때 각상에 커다란 백지로 덮어서 대접하는데 식사
가 끝난 후 마른 음식과 떡을 이 백지에 싸서 가지고 가게 한다. 이를 가봉 이라고
한다.
第6節 주방 용구(熔球)
1. 주방의 모습
함경도지방은 일자형(一字型)집이 많다. 그러나 부유층은 부속건물이 많이 필요하므로
ㄴ, ㄷ 자형도 있다.
이 지방의 부엌은 정지 가 있는 점이 특색이다. 부엌의 큰솥과 작은 솥이 걸리는
것은 주부의 허리정도의 높이이며, 그 높이와 같은 위치에 정지가 있다. 정지의 밑바닥
은 아주 청결하여 여인들과 아랫사람들이 식사하는 곳이다. 저녁때는 정지에서 잠도 자
기도 한다. 불을 아궁이에서 때면 뒷방, 윗방까지도 따뜻하다고 한다.
부엌에 있는 찬장(붙박이장)에는 그릇을 두고 쓰는데 주부들이 많은 신경을 쓰고 꾸
민다. 부엌찬장을 보면 그집의 살림규모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김치류나 장아찌류를 저장해 두는 독은 집안의 북쪽에 위치하며, 일년 내내 묻어둔
채 사용하며 가족이 많은 큰 집일수록 역시 장독수가 많다.
<그림 6> 함경도의 주택구조
2. 식기류(食器類)
(1) 반기와 대접
겨울철에는 놋그릇을 쓰고 여름에는 사기로 된 것을 쓰는데 놋그릇은 두껍고 비교적
크다. 반기(밥그릇)로는 주발이고 국그릇 숭융그릇으로는 대접인데 대접의 모양이 복부
가 둥근 것을 많이 쓴다.
(2) 상
각상을 차릴 때에는 네모상을 많이 쓰고 간단한 술상에는 작은 둥근상이 많이 쓰인
다.
(3) 조리용구
조리용구 중 도마에는 굵은 나무를 자른 원통형의 것이 많고 칼은 무쇠로 된 식칼이
며, 놋쇠로 만들어진 큰 양푼, 나무함지, 대소쿠리, 오지동이 등이 상용된다.
第三章 주 생 활 (住 生 活)
金 鴻 植
第1節 序言 第4節 建築 儀禮
第2節 家屋 平面의 構成 1. 집터의 선택
1. 정주간이 없는 양통집 2. 成造 擇日
2. 정주간이 있는 양통집 3. 開基
3. 사방집 4. 開工
第3節 構造 技術 5. 定礎
1. 材料와 技術 6. 入宅
2. 기초 7. 星主풀이
3. 기둥 8. 歲畵
4. 벽체 9. 春帖子․立春帖
5. 지붕(Ⅰ) 10. 其他 俗信
6. 지붕(Ⅱ)
第1節 서 언(序 言)
황해(黃海)․평안남북편(平安南北篇)에 이어 현장조사 없이 남들이 조사하여 이미 책
으로 나온 것을 다시 정리한 것에 불과함을 재삼 밝혀 둔다. 또한 전자의 것과 다른 점
은 평면 구성(平面 構成)만이 서로 달리 구분하여 기술하였을 뿐, 공간(公刊)의 기능(機
能), 시설물(施設物)과 설비(設備), 가옥(家屋)의 구조(構造), 건축 의례(建築 儀禮) 등은
따로 구분하여 쓰지 않았다. 따라서 가옥(家屋)의 구조(構造)와 건축 의례(建築 儀禮)는
전자에서 생략되었으므로 이곳에서 서술한다.
第2節 가 실 평 면의 구성(家 室 平 面의 構成)
1. 정주간이 없는 양통집
(1) 몸채에 외양간이 있는 집(8칸)
이 집은 강원도와 경기도의 내륙지방 및 황해도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평면의 간살이는 뒤쪽 중앙에 부엌이 오고 그 서쪽으로는 아랫방과 웃방이 나란히 배
치되었으며 동쪽으로는 고방이 놓인다. 부엌 앞에는 아랫봉당이, 아랫방 앞에는 웃봉당
이 배치되었고 아랫봉당과 웃봉당은 서로 개방되어 있는데 웃봉당에는 가끔 마루가 깔
리기도 한다. 아랫봉당의 동쪽에는 외양간이 설치되고 웃방 앞에는 사랑방이 오며 사랑
방 앞에는 전면으로 개방된 툇마루가 놓여 있다.
부뚜막과 아랫방의 부엌벽 사이에는 가마목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있다. 이것은 다른
지방의 주택에서 가마목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용도를 갖고 있으나 그것보다는 더
크고, 함경도 지방에 있는 정주간보다는 훨씬 작아서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크
기의 공간이다. 모든 방에는 앞뒤로 문이 나있다. 앞뜰보다는 규모가 약간 작은 뒤뜰에
는 울타리가 둘러처져 있는데 이것은 영동지방에만 있는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광주산맥 동남쪽에 분포된 정주간 없는 양통집의 안방과 윗방의 뒤쪽에는 뒤란퇴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런집의 부엌과 고방, 외양간, 봉당 등의 회벽은 판자벽으로 되는
경우가 많으며 외양간은 ㄱ자로 꺽어져서 뜰방 아래에 시설되기도 한다. 또한 앞서 말
한 외양간 자리에 사랑방이 들어서고 원래의 사랑방은 단방이 되기도 하며 아랫방 앞의
봉당에는 안방마루가 깔린다.
산간지방에 분포하는 이런 집에는 봉당으로 통하는 대문 이외에는 출입문이 거의 없
고 긴 살창이나 세 살로 된 들 창문이 붙는 것이 고작이다. 이것은 국가의 치안력(治安
力)이 미치지 않는 산간지방에서 도둑에 대한 방어를 고려했기 때문인 듯 하다.
이런 집들은 멸악산맥을 중심으로 신헌군 일부의 산간지대, 송화군, 온천군, 장연군에
분포하며 남쪽으로는 연백, 평천, 평산 등지에 정주간이 없는 양통집의 다른 형태들과
동시에 존재한다.
(2) 몸채에 외양간이 없는 집 (8칸)
몸채에 외양간이 설치되지 않을 때는 몸채의 외양간 위치에 사랑방이 놓인다. 그것의
한 예를 평면 구성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뒤쪽으로 부엌이 죄우 2칸이 만들어지고 동쪽으로 아랫방, 웃방이 놓이는데 자주 이
두 방은 개방되어 통간으로 이용된다. 웃방 앞은 고방(또는 딴방)이 만들어지고 전면 중
앙 좌우 2칸은 봉당인데 아랫방 앞에는 마루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안방마루라고 하며
안방마루 서쪽의 봉당 공간은 헛간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전면 맨 서쪽에는 외양간의
위치에 사랑방이 시설되며 헛간쪽으로 툇마루가 놓인다. 따라서 모든 방의 이용이 마당
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봉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방과 딴방은 밖으로 통하는 문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으며 대신 옆으로 긴 살창이
나 세 살로 된 들창문이 붙는다. 집에는 외부로 나는 문이 거의 없고 헛간(봉당)에 대문
하나만 설치하여 이것을 이용하고 있다.
(3) 살림방이 증가된 정주간이 없는 10칸 양통집
정주간이 없는 양통집은 8칸이 보통이나 확장될 경우에는 10칸이 되며 확장된 부분은
살림방이 된다. 여기에다가 행랑방과 부엌, 외양간 및 고방으로 구성된 행랑채를 가지는
수도 있다.
평면의 간살이는 뒤쪽 중앙에 부엌을 두고 그 서쪽으로는 아랫방, 웃방, 셋째방이 차
례로 배치되며 동쪽으로는 고방이 시설된다. 부엌 앞에는 봉당이 오고 그 왼쪽으로 봉
당마루와 웃사랑방 및 아래사랑방이 놓이며 사랑방의 앞에는 퇴방이 시설된다. 고방 앞
에는 외양간이 시설되기도 하나 외양간 자리까지 봉당을 넓혀 쓰기도 한다. 다만 앞에
서 말한 8칸 양통집과 다른 점은 집의 왼쪽 끝에 셋째방과 아래 사랑방을 더 늘려서 지
었다는 점이다.
이런 집에 따로 부속사로서 독립채를 가질 경우 행랑채라 한다. 행랑채에는 행랑방,
부엌, 외양간, 고방 등으로 구성된다.
강원도의 고산지대에서 부유한 농민들이 살고 있눈 살림방이 증가된(10칸) 정주간 없
는 양통집은 그다지 많이 분포되어 있지는 않은 듯 하다.
정주간이 없는 양통집이 축소될 경우는 8칸 집이 6칸이 되기도 한다. 6칸 집이었을
경우는 외양간과 고방이 없어지고 대신 사랑방이 고방으로 이용된다. 때로는 사랑방을
살림방으로 하고 웃방을 고방 대신으로 쓰이기도 한다.
6칸집 이하가 될 때는 양통집 형태를 떠나 외통집의 형태를 갖춘다. 정주간이 없는
양통집이 외통집으로 변할 때는 그 평면 구성에서 외통집으로는 가장 단순한 외채집의
형태를 갖추고 다만 문의 배치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2. 정주간이 있는 양통집
(1) 함경북도의 보편적 주택(낭림 산맥 북쪽)
이 집은 8칸집으로서 정주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집의 중앙에는 부엌이 있고 부엌
앞에는 부엌과 개방되어 있는 마당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솥 뒤쪽으로 이른바 정주간이
만들어진다. 정주간앞에는 작은 방이 마련되는데 요즈음은 두지 않는다. 정주간의 서쪽
에는 안방과 고방이 차례로 놓이며 그 앞으로는 샛방과 웃방이 배치되고 이 방들 앞에
는 전면이 개방된 툇마루가 놓인다. 부엌의 동쪽에는 방앗간이 만들어지고 그 옆으로
외양간이 배치되는데 외양간과 마당 사이에는 구유가 놓여져서 경계 지어 있다.
이런 집들은 집의 앞뒤로 각각 뜰이 있으며 대개 부속사 없이 구성된다. 웃방과 샛방
에는 쌍미닫이인 이중문을 달고 고방의 굴뚝쪽에는 광창(光窓)을 시설했는데 근래에 와
서는 큰 출입문을 달기도 한다. 방앗간의 광창은 보통 동쪽에 낸다.
함경북도에 주로 분포하는 이런 집에는 자영농들이 많이 살고 있다.
(2) 정주간이 있는 양통집(함경남도의 보편적 주택)
이 집의 평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집의 중앙에 자리한 정주간을 중심으로 그 오른쪽에 아랫방과 웃방을 차례로 놓고 아
랫방과 웃방뒤에는 대략 반칸 크기의 아랫고방과 웃고방이 각각 배치되며 앞으로는 전
면이 개방된 토방에 마루가 깔린다. 정주간의 왼쪽에는 서로 개방된 부엌과 바당공간이
연장 설치되었다. 그것의 앞에는 뒤고방이 배치되고 뒤고방 앞에는 본채에 덧대어서 외
양간이 시설된다.
방앗간은 몸채에 시설하지 않으며 사랑채를 따로 지어서 공간을 확보해나가지 않고
차라리 몸채의 칸수를 늘려 나가는 것이 이 지방의 주거 풍습인 듯하다.
이러한 집은 함경남도에 많이 분포하며 역시 자영농 계층의 집이다.
사랑채를 따로 두는 경우는 외통집이 통례이며 사랑채를 옆채로 가질 경우는 사랑방,
사랑 정주간 및 바당, 고방, 수레간 때로는 대문간으로 구성된다. 사랑채를 앞채로 가지
는 경우는 대문간을 반드시 두게 된다. 만일 대문이 독립으로 만들어질 때는 지붕이 달
린 대문을 한다.
(3) 부속건물을 가진 정주간 있는 양통집
정주간은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더워지는 실내온도를 그대로 이용하는 주거공간이
다. 따라서 부엌과 정주간을 중심으로 하여 그 좌우에 방과 경리시설이 분리해 있는 것
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방의 벽이 가능한 한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고려한 것인 듯
하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서 생각한다면 양통집은 방을 두 줄로 배치함으로서 적어
도 그 칸막이 벽이 외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고려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또한 양통집은 경리시설물을 딴 채로 부설하지 않는 것이 통례인데 이번에는 딴 채를
가진 양통집을 살펴보자.
이 집은 본채와 사랑채가 二(두이)字 모양을 이루는데 그 가운데에 안대문을 세로로
덧달아 냄으로써 집 전체의 모양은 二자 꼴이 된다. 이런 집에 부설되는 사랑채는 외통
집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평면의 상세한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채(몸채)는 앞에서 얘기한 정주간 있는 양통집과 거의 비슷한데 집의 정중앙에는
부엌과 바당공간이 설치되고 여기에서 부뚜막과 연결되어 정주간이 마련된다. 정주간
왼쪽에는 앞으로 샛방과 뒤로 안방을 배치하고 다시 그 왼편에 앞에서부터 웃방, 어간
방, 고방이 차례로 배치된다. 그런데 어간방은 따로 마련되지 않고 웃방과 고방만으로
된 집도 더러 있다. 부엌과 마당의 오른쪽에는 뒤로 방앗간과 앞으로 외양간이 배치되
며 외양간과 마당 사이에는 구유통이 놓여서 경계를 짓고 있다.
사랑채에는 부엌 맞은편에 대문이 시설되고 그 오른쪽에는 석마간이 배치되며 왼쪽으
로는 수레간이 안마당쪽으로 개방되어 배열된다. 수레간의 왼쪽은 정주간의 마당공간이
며 그 왼쪽으로 사랑방 2칸이 배열된다.
안대문간은 몸채의 정주간과 사랑채의 정주간을 연결하며 주거공간과 영농공간을 구
분하고 있다. 안대문간의 양편에는 창고가 시설되어 있다.
함경북도 지방에는 원래 정주간과 샛방 사이에서 시작하여 몸채를 둘러싼 앞담장까지
를 안대문이 달린 담장으로 연결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은 주거 공간과 영농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고 내외 풍습에 따라서 아녀자의 공간과 남성의 활동 공간을
경계 짓는 구실도 했던 것이다.
사랑채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외통집인 것이 통례이지만 몸채와 수직으로 앉아서 ㄱ
자집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대문이 사랑채 안에 시설되지 않을 때에는 대문은 지붕이
있는 별개의 건물로 시설된다. 그리고 독립적인 사랑채나 경리시설물을 가지는 경우와
는 달리 몸채의 규모가 보통 수준이하로 작아지는 경우가 있다. 즉 정주간이 있는 양통
집은 8칸 집에 설치된 고방과 웃방이 없어지게 되나, 그보다 작은 4칸집이 되면 외양간
과 방앗간마저 없어진다. 정주간이 있는 양통집이 4칸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는 드물지
만 더 줄어들게 된다면 그 때는 3칸이나 4칸 외통집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처럼 집의
규모가 작아지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지위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3. 사방집
사방집은 세겹집이라고도 하는데 정주간이 없는 양통집과 함께 광주산맥 동남(철령
이남)지방에 분포한다. 보통은 9칸 정도의 크기이지만 12칸 크기의 집도 있으며 평면의
모양이 각각 9칸 집은 바른네모꼴이고, 12칸집은 긴네모꼴이다.
9칸 집의 평면구성은 왼편에 앞에서부터 큰방부엌, 큰방, 웃방이 오고 중앙에는 봉당,
공청, 고방의 순으로 배열되며 우측으로는 사랑부엌, 아래사랑방, 웃사랑방이 차례로 배
열된다. 큰방과 웃방의 좌측면 및 아래사랑방과 웃사랑방의 우측면에는 툇마루가 각각
깔려 있다. 사랑부엌에 덧이어서 외양간이 배치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처럼 툇마루와 외
양간이 몸채로부터 나오는 것은 정주간이 없는 양통집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봉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큰 대문이 주 출입문이고 나머지 보조 출입문으로는 판자로
된 사랑 부엌문과 외양간 문이 있다. 모든 살림방에는 외부에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나 있고 웃방에는 광창도 시설되어 있다. 일단 집안의 주 출입문인 대문을 들어서
면 봉당을 지나 공청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각 방으로 통하는 문이 마련되어 있다.
다만 사랑부엌과 외양간은 벽이 없이 ㄱ유가 놓여서 구분되고 있다.
12칸 사방집은 기본적으로 9칸집과 같으며 전면에 3칸이 덧붙여진다는 점이 다르다.
덧붙인 3칸은 몸채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된 외양간과 봉당 왼쪽에 오는 고방 및 기
존의 봉당을부터 이어져서 확장된 봉당이다. 고방이 대문 옆에 설치되면 원래의 고방은
샛방으로 바뀌어서 살림방이 된다. 사방집에 있어서의 공청은 외통집의 대청과 그 형태
와 기능에 있어서 매우 유사하다.
사방집은 외통집에서의 몸채와 앞채를 붙인 양통잡아 결합하여 발전된 형태라고 믿어
진다. 이러한 집은 그 규모가 크고 건설 공정이 복잡하며 좋은 건설자재와 정교한 기술
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당히 잘 사는 사람들이 짓는다. 그러나 이 집은 채광과 통풍이
잘 안 되어서 널리 파급되지 못하고 치안능력이 미치지 못하던 산간지방에만 분포되었
다.
第3節 구 조 기 술(構 造 技 術)
1. 재료(材料)와 기술(技術)
민가(民家)는 건축에 전적으로 전업하는 사람이 짓는 것이 아니고 건축 방면에 재능
이 있는 그 지방 농민이 짓는다. 따라서 건축 기법에 있어서도 지방적 특성을 농후하게
반영하여 전통성을 강하게 유지한다. 그것은 건축 재료의 자연 지리적 조건과 그 지방
주민의 기술 전통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건축 기술(技術)에도 적지 않은 지리적(地理的)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북(北)쪽은 자조적인 경향이 강하므로 농민들이 스스로 건물을
짓지만, 남(南)쪽에서는 중요한 구조체는 대목(大木)한테 맡기는 등으로 농민이 스스로
자기 집을 짓는데 투여하는 노동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다).
민가(民家)의 재료(材料)는 남쪽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목재와 점토 그리고 돌로 이
루어진다. 남(南)쪽과 비교하자면 구조체(構造體)의 목조에 대한 의존도가 떨어지고 그
것의 구조 기법도 단순한 셈이다. 벽돌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극
히 제한된 범위에서 일부 지주와 부농 계층에서 이용하였다. 또한 그것의 경제적 여건
으로 말미암아 함경도 쪽은 평안도 보다 덜 쓰여졌다.
2. 기초
집터(지정)는 보통 지면에서부터 30∼80㎝ 높이로 축성한다. 그러나 지대에 따라서는
100㎝ 정도의 높이로도 만든다. 일반적으로 부농은 높게하고 빈농은 낮게 되는 경향이
있으며 평야지대에서는 높게 하고 산간지대에서는 낮게 한다. 이것은 집터의 습기 때문
인 듯 하고 배수 관계를 고려하여 그 높이를 조정한다. 또한 한 집안 안에서도 몸채(안
채)는 높게 하고 부속 건물은 낮게 하여 주택건물의 주종(主宗) 관계를 명확히 하고 전
체 건물 높이를 조화하며 뒤쪽으로 나 앉기 마련인 몸채에 부속건물의 그림자에 가리지
않고 햇빛이 잘 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집터의 축성과 그 높이의 다양함은 모세관 현상에 의해서 올라오는 지면의 습기를 막
음으로서 집의 견고성과 지구성을 보장한다. 또한 집을 토단 위에 올리므로서 건물의
외관미를 높이기도 하는데 이는 백성들의 장구한 생활 경험을 통하여 이루어진 풍습이
라고 보이며 양(陽)인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는 음(陰)인 토담을 옆으로 길게 깔아야 된
다는 음양 풍수사상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초는 보통 집터(토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다. 그러나 일부 서해안 지방
에서는 집터의 표면에서부터 원지표까지 직경 100㎝ 정도를 파고 그 속에 자갈과 흙을
3대 1의 비율로 번갈아 가면서 물을 약간씩 부으면서 다진다. 이것이 축성된 집터 표면
까지 올라온 다음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다. 이러한 지정법은 화성 성역의궤(華
城 城役儀軌)에도 나오는 방법으로서 옛날로부터 쓰여지던 방법으로 믿어진다.
3. 기둥
민가(民家)의 기둥 높이는 보통 9척(尺)이며(남쪽에서는 그보다 약간 낮은 경향이 있
음) 기둥 모양에는 모난것과 둥근 것이 있다. 대체로 모난 것을 썼으며 둥근 것을 쓸 경
우에는 벽체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약한 곳에서만 한 하였다. 그러나 빈곤한 농민의
경우는 극히 소박한 더 깍을 나위조차 없는 가느다란 둥근 기둥을 그대로 섰다. 이렇게
네모 기둥을 쓴 것은 일반 주택에 둥근 기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던 봉건시대의 법령
(림하필기 삼십구권(林下筆記 三十九卷 )참조) 과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벽체는 주로 위에 세운 기둥을 골간으로 하여 형성하였는데 목재로 골조(산자 엮은
것)를 만들고 안팎을 점토로 바른 것이 많았다. 지방에 따라서는 일부분을 돌 또는 판자
로 한 것도 있으며 순전히 목재나 돌로만 한 것도 있다.
4. 벽체
우리나라 민가(民家)의 기본 형(벽체)은 토벽이다. 토벽은 두껍게 둑 또는 토담으로
된 벽체와 산자로 엮은 토벽이 있는데 전자는 추운 북쪽지방에 많은 경향이 있고 후자
는 더운 남쪽 지방에 많은 경향이 있다. 따라서 기후관계와 많이 상관이 있을 것으로
보이나 경제 계층적으로는 전자는 가난한 사람, 후자는 부농이 많다. 이것은 전자가 기
후에 잘 견딜 수 있게 단열이 잘 됨을 뜻하며 후자는 대신 아름답고 구조적으로 건물이
무겁지 않아 내구적이 되기 때문이다. 부농인 경우 이불이나 난방 등을 여유있게 할 수
있으므로 단열이 잘 안되더라도 견딜 수 있었으리라 믿어진다.
또한 토벽과 나무로 된 벽을 비교할 때 전자는 평야지대에 많고 후자는 산간지대에
많다(물론 주택 이외의 특수 건물은 예외이다). 이것은 벽체의 형태가 지대적 조건이나
자재의 원천과 많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돌벽이 많은 곳은 역시 냇가를 끼고 있
어서 어디서나 쉽게 돌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만 이용되기 때문이다.
벽체의 발전적 견지에서 본다면 토담집이나 둑집, 돌담집에서 산자로 엮은 토벽집으
로 나아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것은 19세기 이후 둑집이나 토담집이 없어져 간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데 이는 농민의 생활이 나아져서 잠자리의 이불 등이 충분하여 많
은 노동력을 허비하면서 벽을 두껍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주택의 평면과 벽체의 관계를 살펴보면, 쌍채집인 경우는 일반적으로 둑집이 많으며
정주간이 있는 양통집인 경우에는 토담집이 많다. 꺽음집(ㄱ자(字))인 경우에는 산자 엮
은 집이 많고 이것의 분포지역은 꺽음집의 분포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이것은 자연 지
리적 조건, 경제적 조건에 의해서 형성되면서 하나의 전통적 측면을 가지게 되는 것이
라고 추측한다.
(1) 둑집
이것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30㎝ 정도의 폭을 두고 좌우에 휘틀을 대어 그 가운데 생
기는 공간에 생토를 넣고 다지는 것이다. 이것이 어느정도 굳어지면 휘틀을 올려 가면
서 생토를 다져 넣어 벽체를 만드는 것인데, 문이 설치되는 앞벽에 만은 산자를 엮고
점토를 바른다. 이는 둑으로 된 벽이 구조적으로 견고치 못하여 문을 설치하면 수명이
짧아지기 때문이다.
둑집 벽체를 만들 때는 마을 사람 수 10명을 동원하여 단 하룻만에 작업을 끝냈었다.
이때 동원되는 사람들은 보수 없이 품아시(협조 노동)의 방법이었으며 이는 농촌 주택
건설에 많이 이용되는 과거의 노동 유습이었다.
둑집 벽체는 비바람에 대단히 약했으므로 지붕날개 또는 풍우날개로 보호하였으며 서
북부․평안남북도에 많이 퍼져 있었다. 20세기 초에서부터는 점차로 없어지고 산자 엮
은 집으로 대체되었다.
(2) 토담집
직경 20∼25㎝의 흙 덩어리를 돌담을 축조하는 형식으로 쌓아 올려서 축조하는 것이
다. 둑집과의 차이점은 산자 엮은 벽체와 마찬가지로 인방, 중방 가느다란 샛기둥이 있
으며 흙담을 쌓을 때는 몇 줄씩 쌓고 그 다음에 이미 쌓아올린 흙담이 무너지지 않도록
좌우에 가름대를 대고 새끼로 몇군데를 매서 고정시킨 다음 그 위에 같은 방법으로 토
담을 쌓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벽체를 쌓고서 안팎을 미장한다.
토담집의 벽체 두께도 둑집의 것과 거의 같으며 동북부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서북
부에서도 둑집과 함께 공존한다. 20세기 초부터는 점차로 없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3) 돌담집
이것은 일명 돌막집이라고도 하는데 돌담으로 벽체를 축성하는 것을 말한다. 쌓는 방
법은 점토를이용하여 돌담을 쌓고 내부에서 돌담이 안 보이도록 흙을 바르며 외부에는
돌과 돌 사이만 흙으로 메꾸어서 돌의 표면을 노출하게 된다.
이것은 돌이 많은 강안에서 건설하며 지역적으로는 북청, 태천 지방과 강원도 일부에
서 성행하고 그 수는 대단히 적다.
돌막집이란 원시적 형태의 집으로서 말 그대로 하나의 막에 불과하며 장롱 단칸에 작
은 부엌을 설치하는 정도로 축조한다.
(4) 나무로 된 벽체
이것은 목재만을 이용하여 만든 귀틀집과 토벽과 판자벽을 배합한 판자집이 있으며
후자는 20세기 초까지 존재하다가 사라진 고식(古式)구조기법이다.
귀틀집은 기둥 없이 원목으로 벽체를 만드는 것이다. 문 설치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원목양 끝에 홈을 파서 엇물려서 벽체를 쌓아간다. 원목과 원목 사이에 생기는
틈은 흙으로 메우고 그 위를 흙으로 미장한다. 이 가운데는 내부만 미장하고 외부는 원
목 그대로 노출시키는 틀목집도 있다. 이는 산간지대에 많고 평야지대에서는 안팎을 미
장하는 귀틀집이 많다.
이는「위지 동이전(魏志 東夷傳)」의 진한전(辰韓傳)에 보이는 귀틀집과 연관이 닿는
것이라고 믿어지며 지금은 화전민들에 남아 있는 주거양식(住居樣式)이다. 이것은 그들
의 생활조건 및 수림지대에 산다는 자연조건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판자집은 벽체가 판자로 된 집이나 주택전체의 벽면이 판자로 된 집은 거의 없다. 그
러나 살림방이 아닌 부속시설의 벽체만을 판자벽으로 하는 수가 있으며 일부 사찰, 도
가집, 성황당집도 판자벽으로 하는 수가 있다. 이런 방식은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산청
지방까지에 존재하는 것으로 미루어서 고식기법임을 알 수 있다. 판자벽에는 인방, 중
방, 샛기둥 등이 있으며 거기에 판자를 끼우기 위한 홈을 파고 소박하게 깍은 판자를
세로로 끼운다.
판자벽과 토벽을 배합한 주택은 광주산맥 동남지방, 회양, 금화, 금강, 창도 등지에 분
포하며 19세기 말에 많이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농부 주택인 경우에는 외양간만을 판
자벽으로 하며 판자벽이 있는 지대를 살펴보면 나무가 많은 산간지대나 점토가 없는 사
토지대인 경우가 많다.
(5) 산자로 엮은 토벽
토벽은 점토로 된 벽체로서 산자로 엮은 것과 둑으로 된 것, 토담으로 된 것이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둑집은 순 점토의 둑이고 토담집은 순 점토의 토당으로 만든 집
이다.
산자로 엮은 토벽은 인방과 중방, 중방과 도리 사이에 몇개의 샛기둥을 세우고 그 샛
기둥 사이에 50㎝정도의 가느다란 장대(長竹)를 끼운 다음 그 장대에 의지해서 수수대
또는 겨릅대로 가로로 엮어 골조를 한 것이다. 그 안팎을 점토로 바르며 이것은 다시
초벽, 재벽으로 구분하여 미장한다.
초벽은 점토에 4∼5㎝ 정도로 절단한 볏짚을 갈램 방지와 부착력 증강을 위하여 넣고
바른 것이며 초벽이 건조하면 재벽을 바른다(다른 종류의 벽체도 미장하는 방법은 마찬
가지이다). 재벽은 순수한 점토나 또는 점토와 가는 모래를 섞어 바르는 것으로서 이것
을 사벽이라 부르기도 한다. 부유층은 회가루로 재벽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회(사)벽이
라 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벽체의 두께는 10㎝ 내외가 된다.
산자 엮은 토벽은 중남부의 전형적인 것으로서 19세기에서 20세기초 사이에 전국적인
것으로 확산되었다.
벽담은 산자 엮은 벽체의 일종으로 일명 화방이라 불리우는 덧붙인 벽이다. 벽체의
외부 면에 흙과 돌로써 담을 쌓는 것으로서 지면에서 약 135∼150㎝ 정도의 높이까지
(도리까지 약 55∼60㎝ 정도 벽면을 남기고) 전체 벽을 돌아가면서 쌓는다. 벽담은 모
양 있게 축조하며 축조된 돌과 돌사이를 횟가루로 볼록 줄눈이 되게 곱게 미장한다.
분포지역은 개성을 중심으로 연안, 평천, 평산, 이천, 평강, 철원 등지에 퍼졌으며 개
성 철원 등지에서 북쪽으로 벗어나면 점차 벽담이 낮아지며 동시에 부엌부분 등의 벽체
의 일부에만 축조되다가 나중에는 없어지고 만다. 이는 대청의 주택분포와 거의 일치하
는 남쪽 지방의 풍습이지만, 이는 방화(防火)를 위한 것이므로 경제력이 풍부한 경기(京
畿)지방을 중심으로 펴졌었다.
5. 지붕(Ⅰ)
이영 재료로는 기와집과 초가집, 함석집으로 구분된다. 다시 기와집은 조선기와와 평
기와(왜기와), 돌기와, 나무기와로 구분되며 초가집은 벼짚, 조짚, 새초 등으로 나눈다.
이것을 역사적 기록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大風東來 折木飛瓦(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袛摩尼師今 十一年條 AD 122)
대풍동래 절목기와(삼국사기 권제일 신라본기 제일 지마니사금 십일년조 AD 122)
라는 기록으로 보아서 기원 전후로부터 기와가 사용되었지만 민가에서 사용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그 이전에는 가야의 가형토기(加刑土器)에 주택(住宅)으로서 와가(瓦家)가
있다).
其所居 必依山谷 皆以茅葺舍唯佛寺 神廟及王宮官府乃用瓦(舊唐書 東夷傳 高麗條)
기소거 필의산속 개이모즙사유불사 신묘급왕궁관부내용와(구당서 동이전 고려조)
이것으로 미루어서 6∼7세기초까지는 기와가 일반 민가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8세
기에 신라의 실제(室制)를 보면 백성의 집에 당기와를 금지한 것으로 미루어서 다른 기
와는 일반 민가에서 쓰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令之民間覆屋以瓦 不以茅 炊飯以炭 不以薪 有是耶 敏幕對曰 匡
亦지 聞之如比(三國史記 卷 十一 新羅本記 憲康王 六年條)
왕고위시중민공왈 고문령지민간복옥이와 불이모 취반이탄 불이신 유시야 민막대왈 광
역지문지여비(삼국사기 권 십일 신라본기 헌강왕 육년조)
이를 봐서 9세기에 기와 사용은 민가에서도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王命令富人就宣門內閉地綠道作瓦屋 又命五部民家皆蓋以瓦(高麗史 卷三十三 忠宣王條)
왕명령부인취선문내페지록도작와옥 우명오부민가개개이와(고려사 권삼십삼 충선왕조
라는 기록을 보면 14세기초 이후에는 오히려 기와집을 장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板屋雨聲多(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五十五 江界都護府 凡俗條)
판옥우성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오십오 강계도호부 범속조)
이 기록으로 미루어 지방적 조건에 따라서 나무기와집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無瓦者編茅累重 隔泥土以禦風掣 山洞或用大石以代瓦(孔州 風土記)
무와자편모루중 격니토이어풍체 산동혹용대석이대와(공주 풍토기)
위 기록에서 돌맹이를 얹어 놓았다는 것은 현재의 돌기와집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1) 기와집
조선기와집은 암기와와 숫기와를 배합하여 잇는 것이다. 서까래 위에 산자를 엮어 얹
고 그 위에 10∼16㎝ 두께로 흙을 깔고 암기와를 줄지어 놓는다. 줄과 줄 사이를 흙덩
이로 메꾸고 그 위에 숫기와를 덮는다. 처마 끝에는 막새기와를 얹으며 지붕 네귀의 추
녀마루 끝과 내림새 끝 등, 용마루 끝에는 치미(鴟尾)를 올린다.
마루, 내림새마루, 추녀마루는 기와장으로 덧 쌓아 높게 하는 동시에 그것을 끝으로
점차 내려오면서 더 높아지게 하여 전체적으로 마루 끝이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게 하여
포물선을 이루게 한다.
조선 기와집은 기와골이 깊고 학각집은 지붕의 경사가 심하여 빗물이 잘 흘러 내린
다. 조선기와 집은 육중하면서도 지붕에 형성된 곡선미로 전체적으로 경쾌하게 보인다.
(2) 초가집
초가이영의 재료로는 주택의 발생때 이용되었던 겨릅, 새초, 쑥대 등을 쓰다가 벼, 조,
수수대등의 농작물의 부산물을 쓴 것으로 생각된다. 초가를 잇는 기법으로는 비늘이영
과(일명 뜸이영)사슬이영이 있다.
비늘이영은 형식이 고기비늘과 같은 모양으로 제작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벼짚의
글커리(뿌리쪽)을 밖으로 15㎝ 정도 내놓으면서 엮는다. 이러한 방법으로 지붕의 전후
면과 주택의 좌우벽의 전체 또는 그 일부를 덮을 수 있을 정도로 길고 넓은 두 개의 나
래를 엮는다. 두 개의 나래를 지붕의 전후면에 하나씩 덮고 두 개의 나래가 합치는 등
마루에 곱새를 덮는다. 곱새와 나래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곱새 좌우쪽에 평행으로 새끼
를 느리고 그 새끼 양 끝에 달돌을 달아 놓으며 앞 뒤로는 몇 개를 서까래 끝에 고정한
다.
비늘이영의 나래는 지붕 길이보다 퍽 길어서 그 양 끝이 드리우면 좌우 벽체(굴뚝 포
함)를 덮게 된다. 이 벽체를 덮는 부분을 지붕날개라 한다. 비늘이영은 사슬이영보다 짚
이 덜 썩어 수명이 길며 지붕날개가 있어 풍우로부터 벽체를 보호한다. 또한 단열의 역
할을 하기도 한다.
사슬이영은 짚 글커리가 밖으로 노출되지 않으며 우산각집에 많이 쓰이는 기법으로
그 작업 순서는 다음과 같다. 짚으로 나래를 엮어 일정한 크기의 마름을 수 10개 만들
어 지붕 위에 올려놓고 이영을 잇기 시작한다. 먼저 처마 끝으로 짚 글커리가 놓이게
하여 지붕의 사면에 마름을 굴려가면서 편다. 처마 끝에 엮은 나래를 한 벌 깔고 그 자
리에 나래를 거꾸로-짚 글커리쪽이 등마루를 향하게-지붕 사면에 마름을 굴려가면서
편다. 먼저 편 나래보다 약간씩 등마루쪽으로 올려놓으면서 온 지붕을 돌며 덮는다. 등
마루까지 이르면 마구리는 곱새로 한다. 이것은 표면이 매끈하게 마무리되며 새끼로 고
정한다. 50㎝ 정도의 간격을 두면서 앞뒤와 좌우로 새끼를 늘이어 고정하며 새끼로 글
망을 만들어 덮기도 한다. 지붕날개는 없는게 보통이다. 서북부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
에 걸쳐서 분포하고 있다.
초가 이영 형식은 지붕의 구조형식에 의존하며 지방의 자연조건에 따라 부분적인 변
화를 보이는 듯 하다. 예를 들면 지붕날개의 지방적 변화와 이영을 고정시키는 방법 등
이며 바람이 센 함북지방에서는 이영을 글망으로 고정한다. 또는 이영 위에 긴 장대기
를 가로, 세로로 놓거나 돌을 올려놓는다.
흐른이영은 기본적으로 사슬이영과 같은데 나래를 엮지 않고 벼짚으로 그냥 잇는 바,
별로 많이 이용되지 않으며 보통 경리시설물에 적용된다.
벽체와 지붕은 민가(民家)의 형태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소로서 자연 지리적 조건에
적지 않게 제약되면서 지방적 특성을 갖는다. 또한 경제적 관계와 생산력 발전 수준에
도 적지 않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택의 평면구성에서 보는 바와는 달리 그
렇게 강한 것이 못되며 점차 지방적 특색이 사라지고 일반화하는 과정을 보게 된다. 필
경 이것은 주택의 기본구조를 이루는 평면 구성의 변화에 비하여 개별적 부분들의 변화
와 동화 과정이 빨리 진행된다는 것을 뜻한다. 주택의 평면구성은 전통적으로 오래도록
작용하는 생활관습에 제약되며 벽체와 지붕은 생산력의 발전에 쉽게 변화되는 재료의
제약을 받는다. 따라서 벽체 또는 지붕이 평면구성에 비하여 생활관습과 전통의 작용을
적게 받는다.
(3) 판와(板瓦)
판와(板瓦)에는 세밀하게 가공하지 않은 판석을 기와로 하는 돌기와 지붕과 3∼4㎝
두께의 판자를 길이 30∼45㎝ 정도, 나비 20∼25㎝ 정도되게 끊어서 잇는 나무기와지붕
(너와지붕)으로 나뉜다.
지붕을 잇는 기법은 우선 지붕에 흙을 깔고 처마 끝이 기와를 몇줄 나란히 놓는다. 그
사이에 틈이 생기면 이것을 메꾸는 방법으로 계속 이어 나간다. 이렇게 전체 지붕면을
잇고 등마루, 내림새마루, 추녀마루를 기와장과 흙으로 덧쌓아서 그 선이 두드러지게 하
면서 동시에 일정산 곡선을 이루게 한다.
이것의 분포는 함경북도, 강원도, 황해도 일부의 산간지대 주택에 많다. 그러나 돌기
와 지붕은 산간지대 뿐만이 아니고 평야지대에서도 종종 보인다.
(4) 평기와
이것의 모양은 벌어진 암기와 같은데 한 쪽이 안으로 구부러졌다. 학각집에서는 평기
와를 잇지 않는다. 평기와가 사용되기 시작하던 때부터 함석이 이영재료로 등장하였으
나 농촌 주택에서는 별로 보급이 없었다.
기와를 복합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지붕 사면은 평기와를 잇고 등마루, 내림새
같은 중요부분은 조선기와로 이어서 미적가치를 높힌 것이다. 이로 미루어 봐서 조선기
와는 어느 형태의 기와 보다 미적가치를 풍부히 가지고 있는 재료이다.
6. 지붕(Ⅱ)
지붕의 형태는 배집과 우산각집 그리고 학각집으로 크게 분류된다.
(1) 배집
지붕의 좌우가 수직으로 잘라지는 것으로서 지붕의 평면이 2개의 긴 네모꼴로 가로왈
(曰)자 모양을 이룬다.
구조는 좌우의 하도리 한 가운데에 대공을 세우고 그 위에 대들보를 가로놓으며 그
전후면에 연목을 고정한다. 그 위에 산자를 엮고 그 위에 10∼16㎝ 두께로 지붕 전체
면에 진흙을 까는데 이를 진새친다고 한다. 진새치기가 끝나면 이영을 잇는다.
이런 지붕 형태는 좌우에 채양인 지붕날개 또는 풍우날개를 달아 풍우로부터 벽체를
보호한다. 분포지역은 서북부인 대동강 이북에 주로 많다.
이것은 원시가옥이 최초로 지상으로 올라 왔을 때 귀틀집의 지붕 구조로서 발생할 가
능성이 높으며 중국과의 관계도 생각할 수 있다. 함경도 지방에서는 배집을 주각집이라
고 하며 배집으로 된 향교도 주각집이라 한다. 이는 중국의 주나라 집이란 뜻으로 풀이
된다.
「북지몽강의 주거(北支蒙彊의 住居)」(이동선치(伊東愃治) p.38)에 의하면 과거 중국
에서는 일반 민가에서 우산각집 또는 학각집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배집을 강요했다
고 한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궁전 또는 종교건물은 우산각집이나 학각집이었고
일반 민가에서는 배집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지금도 압록강 연안과 중국 동북지방은 배
집이 지배적인 형태이며 중국 주택의 기본형이라 믿어진다. 따라서 중국과 인접하고 있
는 서북부 지방은 배집의 분포가 많다는 것이 이상스럽지 않다. 그러나 대동강 이남은
우산각집과 병존하고 있다.
(2) 우산각집
지붕의 평면이 4개의 지붕면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전후 2면은 사다리 꼴로 좌우
면은 삼각형 평면으로 된 것이다.
용마루가 다른 형태의 주택보다 훨씬 짧고 대신 중도리 멍에도리 등이 설치되며 연목
이 많이 소요되고 연목 설치형식도 일정치 않아 여러 가지이다. 채양으로서 지붕날개와
풍우날개는 필요치 않으며 우리나라 일반 주택에서 가장 많이 퍼져 있으며 서북부 지역
과 동부지방을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한다.
(3) 학각집
배집과 우산각집이 합친 모양과 같으며 지붕 평면이 마치 평지 봉루와 같은 모양을
이룬다. 이것은 구조 방식이 복잡하지만 가장 외관미가 좋다. 박궁(박공) 부분의 풍판은
판자로 하지 않고 대부분 흙과 돌 또는 기와장으로 축조하고 그 위에 회가루를 볼록 줄
눈으로 바른다. 동부지역의 학각집-부엌의 환기 시설을 위한-을 제외하고 이것에는 조
선기와를 반드시 잇어야 집이 아름다워진다. 20세기초부터는 가끔 양철지붕으로 잇기도
하나 이것은 제외된 범위 안에서 보급되었고 외관미도 조선기와보다 덜하다.
학각지붕은 기와집의 기본형으로서 튼튼한 재료와 많은 량의 기와가 요구되므로 중류
수준을 넘는 농가와 불사, 각 공공건물 등에만 쓰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각지에 퍼진 곡
선미가 풍부하고 아름다운 전통적 지붕의 전형적인 형태이지만 경제적 제약성으로 말미
암아 대중적으로 파급되지는 안았다.
第4節 건 축 의 례(建 築 儀 禮)
종교란 초자연적 힘을 지배한다고 하는 신앙과 숭배이다. 종교적 신앙은 역사적 조건
하에서 발생하며 또한 존재한다.
여러 가지 건축에 있어 속신(俗信)은 낙후한 봉건적 생산관계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특히 일제의 식민지 통치제도가 존속하였던 만큼 농민들의 생활은 온갖 착취와 억압으
로 날로 영락되어서 낡은 봉건적 관습과 미신이 존속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의식
형태를 반영한 것으로 사회경제적 지배를 받는다.
1. 집터의 선택
집터와 방위의 선택은 원래 백성의 생활의 필요성에서 출발하여 입지조건을 고려하여
행하여졌다. 이것이 음양풍수 사상과 결부되면서 실용적인 것을 떠난 신비적인 것이 되
었다.
음양풍수설에 의하면 동쪽에 청용(靑龍), 서쪽에 백호(白虎), 남쪽에 주작(朱雀) 북쪽
에 현무(玄武)를 상징하는 상이 구비되고 앞에 내가 흐르는 지형을 집의 택지를 선정하
는 이른바 명당이라고 하는 곳이다. 묘지의 경우는 특별히 이런 조건을 인공적으로 만
드는 경우는 없었으나 집터의 경우에는 인공적으로 연못을 파서 그것을 대신하는 수도
있었다.
음양풍수사상에는 여러 가지 금기사항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냇물은 그 물결이 너
무 급해서도 안된다고 하였는 바, 그것은 그 물결이 급하면 집으로 흘러들어오는 복이
머물지 못하고 유실된다는 것이다. 집터를 잡는데 금기(禁忌)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집자리 앞에 높은 지형이 있는 것, 묘지 또는 큰 바위가 바라보이는 곳, 사당의 정면
이나 불사의 후면에 해당하는 지형과 형장(刑場), 전장(戰場), 야장간, 옹기점 등등의 유
지(遺地)는 집터로 적당치 못하다고 하였다.
집터의 선정은 지관(地觀), 지사(地師)가 하였으며 지학(地學)에 밝은 사람은 스스로
집터를 선정하였다. 집터의 선택방법을 음양풍수설과 결부시켜 신비한 것을 만들어 놓
고 건축 시일도 음양풍수설에 의하여 성조 택일을 하였다.
2. 성조택일(成造擇日)
일관자(日觀者)가 하는데 주택 건설의 주요단계인 개기(皆旣), 정초(定礎), 상량(上樑),
입주(立柱), 입택(入宅)의 연월일시(年月日時)를 음양오행설에 의하여 정하였다. 예정이
어긋나면 그 정도의 흉내를 내는 정도의 눈속임을 함으로써 예정된 날자를 준수하곤 하
였다.
성조택일을 한 연후에는 집 주인은 상가집에 출입하는 것을 꺼리고 정성을 다 하였
다.
3. 개기(開基)
성조택일에 예정된 날자에 개기제(開基祭)를 지낸다. 개기제(開基祭)는 집터에 흙을
열삽정도 파서 부어놓고 그 주위에 왼새끼를 둘러친다. 약간의 주안을 갖추어 놓고 개
기제고문(開基祭告文)을 읽는 일을 하였다. 이런 행사는 과거에 토지지신(土地之神)이
있다고 생각하여 토지의 신에게 땅을 파헤친다는 것을 아뢰면서 그 신의 안정을 구하였
다. 개기제(開基祭)가 있은 연후에 착공하게 되는데 이를 개공(開工)이라 하였다.
4. 개공(開工)
개공(開工) 때도 주인의 가택신(家宅神)에게 안정을 기원하는 것으로서 목수도 주인과
함께 공구를 가지고 착공을 하였다. 이때 지방에 따라서는 붉은 종이에 개공대길(開工
大吉)이라고 써서 주요한 목재에다 붙이고 동시에 백지에다 강태공재지(姜太公在地)라
고 써서 처음 착수하는 곳에 붙이기도 하였다.
만일 개공날에 어떤 사정으로 착공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재목으로 짝지발을 두 개 만
들어 양쪽에 세우고 그 위에 한 개의 재목을 가로로 얹어 놓은 것으로써 착공한 것을
대치하였다.
5. 정초(定礎)
집터를 다 구축하고 주춧돌 놓는 일이 끝나면 기둥을 세우고 상량(上樑)한다. 상량할
때에도 간단한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그것을 상량제(上樑祭)라 하였다. 상량할 때 용마루
주 대들보에 상량문을 썼다. 상량문에는
庚辰年 庚辰月 庚辰日 庚辰時 姜太公 下馬處 成造主某 木手 某
경진년 경진월 경진일 경진시 강태공 하마처 성조주모 목수 모
龍 干支何月何日干支時 龜 [용 간지하월하일간지시 귀]
應天上之三光 備人間之五福 [응천상지삼광 비인간지오복]
등의 여러 가지 문구를 썼다.
경도잡기(京都雜記)에 새로 대문을 달았을 때 거기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조(庚申年 庚申月 庚申日 庚申時 姜太公造)」라고 쓰는 것은 쇠가 나무를 이긴다
는 뜻으로서 사용한 나무로 인한 탈(목신(木神)의 노여움)을 막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짐작컨데 「강태공조(姜太公造)」라고 쓰는 것은 강태공이 장수하였던
것과 같이 건물이 영구히 존속하리라는 의미이며, 용(龍)․귀(龜)자를 쓰는 것은 거북과
용이 물속에서 사는 신령한 동물로서 불을 이긴다는 화재 방지의 오행사상에서 나온 것
같다. 삼광(三光)은 일월성(日月星)을 오복(五福)은 수(壽), 복(福), 다남(多男), 위(位),
건강(健康)을 의미한다.
6. 입택(入宅)
새로 건축한 집으로 처음 이사하거나 이미 살던 집에서 다른 사람이 살던 집으로 이
사를 하는 것을 집들이한다고 한다. 집들이는 아무 날이나 하지 않으며 날받이 하는 사
람이 선정한 길일(吉日)에 하였다.
집들이 하는 날에는 동리사람들이 많이 자발적으로 동원되어 살림살이 도구를 전부
날라준다. 예컨데 이사 할 때에는 전에 살던 집에서 쓰던 불(화로불)과 물(물독 또는 물
동이에 있는 물)을 반드시 가지고 간다던가 같은 가족 성원이라도 새집에는 되는대로
들어가지 않고 일정한 순위로 들어간다던가 지위에 따라 성(性)에 따라 들어가는 문을
달리한다던가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사가 끝나면 주인은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서 동리 주민들을 초청하여 대접하는 풍
습이 있었는데 이것을 「집들이 턱」이라 하였다. 집들이 턱에 참가하는 사람은 별도로
선물을 하였으며 보통 성냥으로 하였다. 이것은 성냥가지와 같이 자손이 많아지며 성냥
불이 이는 것과 같이 그 집 살림에서 재복과 영화가 일기를 축원하는 의미에서라고 한
다.
7. 성주(星主)풀이
주택 건설이 끝나면 보통 성주풀이라는 행사를 하고 입택(入宅)하였다. 성주풀이(성주
굿 또는 성주풀이 굿이라고도 함)라는 것은 각종 가신(家神)을 위한 샤마니즘적 행사로
서 집에 따라서는 복술을 불러다가 하는 수도 있었다.
성주풀이 굿을 하는 데는 우선 그 굿을 하기 위하여 가메보 또는 상고주에 베를 걸어
놓고 바당에는 양푼에 찰떡, 동구레미떡, 설기떡 등을, 함박에는 쌀을, 바리에는 명미를
각각 담아 차려 놓는다. 이렇게 차려 놓은 다음 그 앞에서 평복을 입은 복술이가 각종
경문을 외우면서 집에 있는 각종 신의 안정을 축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주굿은 새 집
을 지었을 때만이 아니라 집안에서 어떤탈이 생겼을 때도 시행하곤 하였다.
함흥지방에서 성주굿을 할 때 외우던 경문의 일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구묵(굴뚝)에는 구묵장군 놀라지 말고 안정하시오. 방안에는 호랑장군이 안정하시
요. 가메목에 봉당각시, 봉당부인 안정하시요. 고방에는 고방각시, 고방부인 안정하시요.
가매(가마)안에 쟁군각시, 쟁군부인 안정하시요. 베게는(부엌에는) 졸대장군, 졸대부인
안정하시요. 물둥게(물두무)에는 수천장군, 수천부인 안정하시요. 쌀독에는 재미장군, 재
미장군, 재미부인 안정하시오.」
「조왕신 조왕당으로 하강하옵소서. 만세 만세 수만세, 천세 천세 수만세, 복수로 점
지하옵소서.」
8. 세화(歲畵)
설날에 앞서서는 주택 안팎을 깨끗하게 청소할 뿐만이 아니고 새해를 행복하게 맞이
하기 위하여 실내에 여러 가지 그림을 붙였는데 이를 세화(歲畵)라 한다. 이렇게 그림을
붙이던 풍습은 1920∼30년대까지 있었다. 세화에는 호랑이 닭등을 그린 것이 있었고 처
용(處容), 무장한 장군, 보물을 가진 여자 등을 그린 것도 있었다.
淸晨附畵物於門戶窓扉 如處容 角鬼 鐘馗 幞頭官人 介冑將軍擎玲寶婦人 和鷄 畵虎之類
也(成俔의 慵齋叢話)
청신부화물어문호창비 여처용 각귀 종규 복두관인 개주장군경령보부인 화계 화호지류
야(성현의 용재총화)
새벽에 문, 장, 벽장문에 벽장문에 처용, 뿔난 귀신, 종규, 복두 쓴 관인, 갑옷 입고 투
구를 쓴 장군, 진보를 든 부인, 닭과 호랑이를 그린 것 따위의 그림을 붙인다는 기록으
로 봐서 옛날에는 소위 민화(民畵)로서 집을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9. 춘첩자(春帖子)․입춘첩(立春帖)
입춘(立春)날에는 집집마다 주택의 내외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기둥이나 대문 벽 등에
여러 가지 내용의 글을 써서 붙이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을 춘첩자(春帖子), 또는 입춘
첩(立春帖)이라고 말한다. 입춘첩(立春帖)은 옛날에 대궐을 비롯하여 양반, 관리, 평민에
이르기까지 파급되었던 바 그 내용에는 큰차가 없었으며 모두 건강과 풍년, 평화를 염
원하는 연구(聯句)였다. 민가에서 입춘첩(立春帖)에 쓰는 연구(聯句)는 대략 다음과 같
았다.
壽如山 富如海[수여산 부여해]
去千災 來百福[거천재 래백복]
立春大吉 建陽多慶[입춘대길 건양다경]
愛君希道泰 憂國願年豊[애군희도태 우국원년풍]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
國有風雲慶 家無桂玉愁[국유풍운경 가무계옥수]
天下太平春 四方無一事[천하태평춘 사방무일사]
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
春到門前增富貴 春光先倒吉人家[춘도문전증부귀 춘광선도길인가]
上有好鳥相和嗚 一春和氣滿門楣[상유호조상화오 일춘화기만문미]
입춘자의 내용은 과거 우리 조상들의 정신세계 일면을 반영하는 것으로 과거 우리나
라 농민들이 얼마나 평화와 행복을 귀중히 여기었는가 알 수 있다. 입춘자는 글을 지어
붙이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개는 옛날 사람들의 좋은 글을 따서 썼다.
10. 기타 속신(俗信)
악역신(惡疫神)이 집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는 주술(呪術)로서 가시나무에 여러
가지 물건을 달아 맨 것을 대문 웃 부분(처마 밑)에 끼우거나 달아 매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많은 지방에서 널리 퍼진 속신(俗信)이었다.
어린애를 낳았을 때는 처마 밑에 숯뭉치를 끼운 새끼줄을 늘이고 거기에 남아일 경우
솔잎을 많이, 여자일 경우에는 적게 달아 매는 풍습이 있었던 바 역시 악마의 침입을
예방하겠다는 주술이었다. 또 외래인을 금지하는 표식 혹은 남아인가 여아인가에 따라
그 표식을 구별한 것은 역시 남존여비, 부귀다남의 사상과 관계되는 것 같다. 이러한 금
줄은 장기적인 것이 아니고 단기적인 것으로 삼칠일이 지나면 제거하였다.
적지 않은 농촌 주택 특히 세대가 오랜 집들에서 속신적 시설물의 한가지 또는 몇가
지를 일정한 장소에 만들어 놓고 정기적이나 혹은 임시적으로 제(祭)를 지내면서 병마
를 방지하고 행복을 갖다 줄 것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가운데는 웃방 한 구석
에 두는 「원기독」「재석동이」가 있는가 하면, 부엌에 두는 「조왕단지」, 대문에 두
는「수문장」등과 뒤뜰에 설치하는「토사단지」, 「간주동이」,「살륭」등 각종 「쥐저
리」가 있었는데 이러한 것은 항구적이었으며 집을 이사할 때도 가지고 가곤 하였다.
온갖 종교적 신앙을 배양하는 물질적 근원이 없어져도 사람의 의식속에 남아 있는 종
교적 편견과 낡은 생활 풍습이 일시에 극복되지 않으며 의식의 발전이 사람들의 물질적
생활 조건의 발전에 뒤떨어지는 것이 사회적 현상이다.

'++ 유용한 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게임 개발 관련 직업별 개요  (0) 2012.09.25
상가집 조문요령  (0) 2012.07.26
세계각국의 비지니스 환경 순위  (0) 2012.02.04
세계각국의 주요 정보  (0) 2012.01.18
새로 추가된 표준어 목록  (0) 2011.11.08